▲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대한민국에서 선거공약을 100%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거 시기 정책은 현실적 장벽에 의해 또는 당선 이후 노선 변화에 의해 말의 성찬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중 경제정책은 특히 그랬다. 선거 시기에 여러 경제정책이 쏟아져 나왔지만 집권 이후 정책은 새누리당·민주통합당을 가릴 것 없이 비슷했다.

지난 20년간 경제정책을 잠시 살펴보자. 김영삼부터 이명박까지 20년간 모든 정부의 경제정책은 대선 기간에 무엇을 이야기했던 간에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누구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시장규제 철폐·민영화·노동유연화는 모든 정권에서 공통적으로 추진됐다.

둘째, 재벌 지원정책 역시 모든 정권에서 방법만 달랐지 공통적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해외차입을 지원했고, 김대중 정부는 재벌들의 부채를 해결해 줬다. 노무현 정부는 재벌의 가장 큰 수출 대상인 중국과 미국시장을 위해 무역통상에 장애가 되는 국내산업을 포기해 줬고, 이명박 정부는 대규모 국내 토목건설 투자와 감세를 통해 세계 경제위기로 매출이 줄어든 재벌에게 현금을 수혈해 줬다.

셋째, 한국 경제성장의 핵심을 모두 대외거래에서 찾았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위한 시장개방과 규제철폐에 온 힘을 쏟았다. 김대중 정부는 은행과 주요 기간산업을 해외자본에 넘기는 것은 물론 주식시장에 외국인자본을 유입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 금융허브론을 통해 중국과의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선언하고 미국과 FTA 협상을 개시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를 마무리하고, 거시경제 정책을 수출확대에 종속시켰다.

시장규제 축소·재벌 지원·통상무역 확대. 이 세 가지는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지난 20년간 한국 경제정책의 중심축이었다. 물론 대선시기 공약은 네 명이 모두 달랐다.

이 중 노무현 정권은 실제 집권 이후 경제정책이 대선 공약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가장 극단적으로 증명한 사례다. 노무현은 대선정책으로 재벌개혁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정작 집권 초기부터 말년까지 경제정책의 핵심기조를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금융 중심 동북아 경제허브였다. 노무현 정부가 동북아 경제허브를 위해 가장 열정적으로 추진한 두 가지는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획기적으로 확대하고(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 동북아 다른 국가에 비해 질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미국과 경제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2004년 쌍용자동차를 중국 상하이차에 매각한 것은 노무현 정부가 중국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2006년 한미FTA 협상 개시는 미국을 위한 선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경제민주화를 주장하고 있는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후보의 정책들 역시 의심해 볼 일이다. 양쪽 캠프 모두 노무현 정부의 경제 브레인들이 대거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두 후보의 캠프에서 경제정책을 맡고 있는 이헌재·이정우·박승·장하성 등은 모두 노무현 정부 시절 정부 혹은 시민단체에서 동북아 금융허브론, 주주자본주의 등 금융혁신을 이끌던 사람들이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현재 무엇을 이야기하든 정책의 중심에는 노무현 경제팀이 있다.

노무현이 재벌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결국 한국경제의 금융화와 재벌지원에 몰입한 것과 지금의 후보들이 다르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수십 년 동안 일관되게 추진돼 온 규제철폐·재벌지원·수출확대 정책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한 추진세력이 존재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한국의 발전전망을 둘러싸고 내전을 치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후보 주위 경제참모들만 봐도 이들이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은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차기 정권에서도 핵심 경제정책은 통상정책과 금융화 정책에 머물 것이다. 통상정책은 노무현부터 이명박까지 초지일관 추진된 FTA 체결과 안정화 정책이 핵심이다. 당장 차기 정권은 한미FTA부터 안정화시킬 것이다. 한미FTA의 문제점들은 고스란히 한국경제 내부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금융화 정책의 핵심은 경제 핵폭탄으로 불리는 가계부채 대책이 될 것으로 보인다. 1천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의 가계부채는 가처분소득 대비 비중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시작 당시 미국보다 높다. 그리고 가계부채 증가속도가 경제성장률 증가 속도의 세 배에 이른다. 저성장 국면이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근본적 경제정책 변화가 없다면 가계부채 문제를 봉합하는 방법은 자산시장 거품을 계속 확대시키는 것밖에 없다.

노동운동은 정권교체에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희망이 될 준비를 해야 한다. 현장에서부터 산별연맹, 그리고 민주노총까지 십수 년간 약화돼 온 조직을 혁신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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