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노무사
(민주노총 대전충남법률원)

어느 날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고 있는데 자정이 넘어 전화벨이 울렸다. “이 야심한 시간에 누가 사무실에 전화를 했지? 받지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혹시 몰라 전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히 취객의 그것이었다.

"나 A인데, 지금 피 흘리고 있다."

'역시 장난전화였군!' 대충 달래서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가 어느 노조 사업장의 지부장 이름을 대며 아느냐고 물었다. ‘누구지? 장난전화가 아닌가?’ 만취상태인 것은 분명했지만 이제 피 흘리고 있다는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묻고, 달래고 하면서 30여분간 얘기를 나누다 도중에 통화가 끊기고 말았다. 상대방의 얘기를 정확하게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어떤 일로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능히 알 수 있었다.

걱정이 되어 지부장에게 통화를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날 오전에야 통화가 됐다. A의 얘기를 하고 연락을 해 보라고 했더니 이미 알고 있는 듯 장기투쟁을 하던 과정에서 퇴사를 하고 조그만 자영업을 하고 있는데 매우 힘들어한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사업장의 조합원이었다면 내가 알 수도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그 밤에 왜 전화를 했을까. 풀지 못한 원망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 사업장은 사업주가 경영이 어렵다며 불성실 교섭으로 일관하고 임금을 체불하며 다수의 조합원들을 해고해 수백일 동안 쟁의행위가 이어진 곳이었다. 지역의 모든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들이 달라붙어 겨우 단체협약 체결과 해고자 문제 등에 합의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그 사업장의 소식은 잘 들을 수 없었고, 조합원들도 자주 볼 기회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또 다른 사업장의 B에 생각이 미쳤다. B는 산재처리도 쉽게 할 수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해 보고자 노동조합을 새로 설립했으나 사장은 자기 사업장에 노조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며 단체교섭을 거부하고 6개월간 공격적 직장폐쇄를 했었다.

이 과정에서 B는 징계해고를 당했고, 노동위원회와 법원을 거치면서 2년 가까이 해고자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매주 3~4일을 보던 조합원이었는데,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게 되자 생계 때문에 조합활동에 전념할 수 없어 한동안 자주 보지 못했다. 어찌 지내는지 전화를 해 보려는 사이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어떻게 하면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지 묻는 전화였다. 대략 상황을 전해 듣고 약속을 잡았다. 어쩌면 짧은 만남으로 끝날 수도 있고, 오랫동안 술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수년간 상담이나 조합활동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해 좌절했던 이들도 있고, 이제는 더 이상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지금도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 조합원들이 있다. 모쪼록 그들 모두에게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이들에게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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