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구은회 기자

“전태일이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얼굴을 들추어낸 횃불이었다면 고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의 빛이었다.”(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다음달 3일 노동자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의 1주기를 앞두고 고인의 삶을 조명하는 토론회가 마련됐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노동·통일·민주화운동가였던 고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수렁에 빠진 노동운동의 갈 길을 모색하자는 취지다.

전태일재단 주최로 27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의 삶을 조명한다’ 토론회에는 고인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는 노동계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토론회 발제자로 나선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결연한 노동운동가로서 고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아들 전태일 동지의 거룩한 죽음을 계기로 결연할 의지로 투쟁에 나서 이 나라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아들과의 약속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당면한 노동 문제와 노동조합의 과제에 대해 스스로의 결단과 투쟁으로 과감히 맞섰다. 밑바닥 노동자,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을 위한 고인의 헌신적인 사랑과 투쟁이야말로 전태일 열사가 죽음으로 알리려 했던 인간해방·노동해방의 사상과 철학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이 이사장은 그러나 “인간해방·노동해방이라는 전태일 열사의 오랜 꿈과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노동현장은 좌절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고 진단했다. 노조조직률·현장조직력·연대·도덕성·지도력·방향성 같은 노동운동의 핵심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노동운동에 기반한 진보정치는 파탄 직전의 위기로까지 몰려 있다는 설명이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는 어디로 향해야 하나. 노동자의 단결과 통일은 어떻게 이뤄 낼 수 있을까. 이 이사장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운동의 지도자·활동가·간부들의 의식과 자세, 역할과 임무를 재정립하는 일”이라며 “오늘 어머니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싸우려면 많이 먹어야지"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나누어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김지하 시인)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숙희 전 청계피복노조 교육선정부장은 “싸우려면 많이 먹어야 된다”며 보는 사람마다 밥을 권하던 고인의 성품에 대해 떠올렸다.

“어머니는 전쟁 같은 노동의 현장에 서 있는 우리에게 밥을 먹이려 하셨다. 먹어야 살지, 먹어야 싸우지, 먹어야 돈을 벌지…. 어머니의 밥은 함께 먹는 것, 누구에게나 나누는 것, 굶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밥은 이념도 정치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어머니의 밥그릇이 평등이고 분배고 복지이며 민주주의였다.”

심상정 통합진보당 의원도 고인이 내주던 밥을 기억했다. 심 의원은 “85년 구로동맹파업 때 파업 노동자 수천 명이 쫓겨나 전태일기념사업회를 찾아갔는데, 그때 어머니께서 노동자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으며 ‘싸우려면 밥 많이 먹어야 된다’면서 헌옷 팔아 모은 돈으로 밥을 내주셨다”며 “언제나 정겹고 푸근하게 맞아주시던 어머니에게 오늘은 회초리 맞을 각오로 찾아왔다”고 말을 이었다. 통합진보당의 분열을 염두에 둔 말이다.

심 의원은 “국민들이 모아 준 220만표를 종잣돈 삼아 백척간두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변화의 복판에서 힘차게 노를 저어야 하지만, 죄송스럽게 낡은 허물을 벗는 과정에서 기진맥진한 상황”이라며 “늘 단결하라던 어머님 앞에 서기가 죄송할 따름”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실천과 의리 '이소선 정신'


“다투지 말 것이며 작은 차이를 넘어 크게 하나가 되어 나가라고 타이르며 꾸짖으며 다시 다독이셨습니다.”(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고인은 생전에 노동자의 단결을 최고의 가치로 가르치고 당부했다. 특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으로 양분된 노동계가 작은 차이를 넘어 크게 하나가 될 것을 희망했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단결해서 투쟁하는 ‘이소선 정신’을 받드는 것이 민주노총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이소선 정신은 곧 실천과 의리다. 단결투쟁가를 부르며 머리·가슴·등에 단결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우리가 단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리가 없기 때문이다. 의로운 대의에 복무할 때 단결은 따라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매일 단결을 외치지만 잘 안 되는 것은 사사로운 이익에 경도돼 대의를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정파나 종파로의 단결은 의롭지 않은 단결이다.”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권한대행은 초심을 강조했다. 노동운동이 ‘사람 사랑·노동자 사랑’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동료에게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 주던 전태일 열사의 노동자 사랑 정신은 어머니의 정신과 하나였다. 사람을 사랑하고 노동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노동운동을 하는 모든 이들의 초심이자 기본이다. 관료주의·관성화·출세주의 이 모든 것은 초심을 잃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현 시기 노동운동가들이 반성하며 돌아봐야 할 지점이다.”

'단결투쟁' 정신은 계승된다

“나이가 훨씬 많은 유가협 어머니들조차 고인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어머니’라고 불렀다. 보통명사로서의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사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에 계신 분이다.”(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상임이사)

고인은 지난해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부산 영도에 있는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장에 가고자 했다. 2년 전 정리해고 반대 옥쇄투쟁이 벌어졌던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정문 밖에서 손수건을 흔들던 고인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노동자들의 곁에 있고자 했다. 하지만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수석부지부장은 뜨거웠던 도장공장 옥상에서 내려다본 고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유가협 어머니들과 함께 도장공장을 향해 손수건을 흔들던 모습, 휴대전화로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시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개구멍을 찾아 달라’고, ‘개구멍이라도 들어가서 노동자들 얼굴을 보고 나와야 되겠다’던 말씀도 큰 힘이 됐다. 당시 어머니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을 때였는데, ‘나중에 한 번 꼭 모셔야지’ 했던 다짐을 이루지 못했다.”

고인에 대한 아쉬움은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고인의 영결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던 '이소선 어머니 합창단'이 대표적이다. 하나가 되라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양대 노총 조합원이 주축이 돼 만들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홈플러스노조 월드컵지부·공공운수노조 국립오페라합창단지부·한국마필관리사노조·연세의료원노조 등 양대 노총 소속 조합원 42명이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입단원도 모집 중이다. 다음달 3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리는 고인의 1주기 추도식에서도 노래를 부른다. 같은날 오후 서울 청계천 5가 전태일다리 위에서는 고인을 기리는 추도공연이 마련된다. 김득중 수석부지부장은 “싸우면서 노래하고 노래하면서 싸우는, 그래서 단결투쟁해 승리하라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 가고 있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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