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태
인하대
사회과학부 교수

지난달 28일 13명의 소속 의원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의총에서 예상을 뒤엎고 이석기·김재연 의원에 대한 제명안이 부결됨에 따라 통합진보당이 2008년에 이어 다시 분당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들이 쏟아지고 있다. 제명안 부결 직후 국민참여당계 전·현직 간부들이 참석한 긴급회의에서 탈당 등의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같은달 31일까지 탈당한 당원이 2천200여명, 당비납부 중단자가 1천300여명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분당은 피한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는 대중적 기대와 정치적 영향력은 극도로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철수 현상’이 보여 주듯이, 대선을 앞둔 지금 이 시점에서 국민들의 기성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해 있다. 박근혜가 대세라고 하지만 ‘더러운 정치’에 때묻지 않은 안철수의 ‘카리스마’와 새누리당 공천헌금 사건으로 휘청거리고 있고, 안철수 또한 선거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검증의 칼날이 사정없이 그를 겨냥하고 있어 당선은커녕 생존 가능성도 알 수 없다. 2004년 총선 경험에 비춰 보면, 이런 상황은 진보정당에게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될 터이다.

빠른 시일 내 분당을 피하고 대중의 기대와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해 대선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이 무엇인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통합진보당 사태를 야기한 직접적인 요인은 당내 부정선거였다. 그런데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 처음부터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던 것 같다. 그 ‘주범’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구 당권파(경기동부연합과 광주전남연합)가 주로 지목됐고, 비례대표 경선 당선자의 총사퇴로 부정선거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총선 전후에 보인 구 당권파의 ‘패권적’ 행태가 문제의 근저에 깔려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나, 그렇다고 해서 사실관계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할 부정선거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은 문제해결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마저도 부정선거의 주요 책임이 구 당권파에게 있는 것처럼 논의하고 처리한 것이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다. 구 당권파 의원 제명이라는 자신의 입장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해서 탈당을 ‘선동’하거나 직접 행하는 것도 결코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정선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신당권파도 지금의 사태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당권파 사람들도 부정선거와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면 더욱 그렇다.

진정한 통합과 단결은 ‘대선 승리라는 당 전체의 중차대한 목표를 앞에 두고 또는 가공한 적을 앞에 두고 내부적으로 분열하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자신이나 상대방의 명백한 잘못을 두둔하고 덮어 주는 것에서 생기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이 이런 식으로 통합과 단결을 도모한다면, 이승만을 비롯한 친미반공주의세력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해방정국에서 좌파세력과 민족주의세력이 ‘친일 청산’을 강하게 요구하자, 이승만을 비롯한 친미반공세력은 ‘남북대치라는 난국과 건국이라는 대업을 앞에 두고 과거를 문제 삼으면 안된다’면서 ‘묻지 마’ 대동단결론을 내세웠다. 그 결과 해방 이후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속에 있는 친일 잔재가 우리 사회와 외교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구 당권파의 제안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진보정치의 발전에 크나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지난 3월의 부정선거를 자행한 사람은 적법한 절차와 방법으로 분명히 밝혀 그에 합당한 법적 처벌을 내리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반성할 경우 ‘사면’하는 것이 중장기적이고 진정한 화합과 단결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이 직면하고 있는 지금의 위기상황은 스스로 만든 재앙이다. 또한 그 재앙은 지난해 말 무리하게 통합하면서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조직문화와 노선이 다르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뿌리를 내리지 않은 데다 ‘준법’ 정신도 확고하지 않은 상황에서 허술한 선거관리 시스템으로 경선을 치렀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 내 정파들이 다시 갈라서면 당장 대선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은 구제불능이라는 고정관념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자유민주주주의자'조차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되던 권위주의 군사정권하에서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지금의 사태를 직접 유발한 부정선거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말끔히 정리하자. 그리고 상호신뢰를 쌓기 위한 모든 행동을 차근차근 해 나가는 것만이 통합진보당에 몸담고 있는 사람 모두가 사는 길이요 국민의 희망을 살리는 길이다.

인하대 사회과학부 교수 (ytjung@in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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