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범
공인노무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

최근 대법원은 학력 허위기재를 이유로 행한 해고는 부당해고라고 판결했다. 판결문 핵심 내용을 보자.

“이력서에 대학졸업 사실을 기재하지 않은 근로자를 학력 등의 허위기재를 징계해고사유로 규정한 취업규칙에 근거하여 해고하는 경우 고용 당시에 사용자가 근로자의 실제 학력 등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하였을지에 대하여 추단하는 이른바 가정적 인과관계의 요소뿐 아니라 고용 이후 해고 시점까지의 제반사정을 보태어 보더라도 그 해고가 사회통념상 현저히 부당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이 되어야만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다.”(대법원 2009두16763 선고)

필자는 해당 판결의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것을 보며, 얼마 전 담당했던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정당한 해고라며 구제신청이 기각된 사건의 결과 때문이 아니었다. 심문회의 진행 과정에서 있었던 담당 공익위원의 발언 내용이 갑자기 떠올라서였다.

K씨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중견기업에 20년 이상 재직하면서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노조간부 역할을 10년 가까이 담당했다. 결국 노조활동 과정에서 발생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해고됐다. K씨가 스스로 사직하는 대신 동료들의 고용을 보장해 주기로 회사와 합의한 것이다. K씨는 해고를 당한 이후 평소 알고 지내던 선배의 일을 돕기도 하고 스페어 기사로 택시운전을 하다 지역의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 K씨는 입사지원서를 제출하면서 이력서에 노동조합 활동경력을 기재하지 않았다. 노동조합 활동경력을 기재해야 할 법률상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노조간부 경력이 있는 것을 사용자가 알게 된다면 채용을 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입사하던 시점에 회사 내에서는 노동조합 결성이 준비되고 있었다. 노동조합 활동경험이 많은 K씨는 동료들의 요청에 따라 노동조합 설립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됐다. 회사는 노조설립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K씨의 노조경력을 알게 됐고, 경력 허위기재 등을 이유로(노조 설립 과정에서 발생한 몇 가지 징계사유가 더 있었다) 해고처분을 했다. K씨와 노동조합은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당연히 노조측은 노조경력 미기재가 징계사유가 될 수 없음을, 사측은 경력 미기재가 징계사유가 해당됨을 기존 판례입장에 근거해 주장했다.

문제가 되는 장면은 심문회의가 끝나 갈 무렵 발생했다. 해당 심판위원회 공익위원이 신청인인 K씨에게 “노조위원장 경력은 자랑스러운 경력인데 왜 이력서에 기재하지 않았느냐”고 물은 것이다. K씨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노조위원장 경력이 기업 입사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면 기재할 수 있겠지만, 아직 우리는 노조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기업들이 낙인찍고 고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느냐”고 답변했다.

필자는 지금도 해당 공익위원이 어떠한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약간은 비꼬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정말 세상물정을 잘 몰라서 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아직도 노조경력을 이력서에 기재하는 것이 사실상 취업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풍토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노동조합 경력을 말 그대로 경력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기재할 수 있는 세상이 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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