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최근 유럽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다른 나라에 비해 실업률이 낮고, 고용은 오히려 늘고 있다. 일자리 기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단시간 저임금 노동자가 늘어 양극화가 심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독일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매일노동뉴스>가 고용노동부와 함께 지난달 6일부터 나흘간 독일 현지에서 취재한 내용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게재 순서]
1. 근로기준법 개정, 이제 시작?
2. 독일 노동시장 현황과 과제
3. 노동시간단축, 독일 고용위기를 넘다
4. 실업급여·실업부조 투 트랙, 취업을 잡아라
5. 근로시간저축제와 노동유연화, 대안일까

서울지역 한 사회복지법인 직원인 김아무개(39)씨는 법인이 회원을 대상으로 최근 개최한 주말행사 지원업무를 수행한 뒤 다음주 월요일에 휴가를 받았다. 휴일인 주말에 일했으니 주중 하루를 쉰 것이다. 언론사에서 일하는 김아무개(37)씨는 당번제로 돌아가는 야근을 하면 다음날 오전까지 늦잠을 자고 점심을 먹은 후 출근한다.

정부는 지난 2010년 11월 근로시간저축휴가제(저축휴가제)를 도입하겠다며 근로기준법(근기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법안은 회기 종료로 자동폐기됐다. 정부는 9월께 정기국회에 같은 내용의 근기법 개정안을 다시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저축휴가제 담은 근기법 개정안 9월 발의

근로시간계좌제라고도 불리는 저축휴가제는 2010년 10월 정부가 발표한 '국가고용전략 2020'에서 처음 소개됐다. 독일·프랑스·네덜란드와 같은 유럽국가는 대부분이 시행하는 제도다.

우리나라에서도 생소한 개념은 아니다. 정부는 2004년 7월 휴일·연장·야간근로를 포함한 초과근로를 휴가로 보상하는 보상휴가제를 도입했다. 앞서 제시한 두 김씨의 사례처럼 주말근무나 야근을 했을 경우 주중에 하루를 휴가로 주거나 오전근무를 면제하는 것이 모두 이 범위에 포함된다.

보상휴가제는 먼저 초과근로를 한 후 그 시간만큼 휴가를 받는 개념이다. 저축휴가제는 보상휴가제에, 먼저 휴가를 사용하고 나중에 초과근로를 하는 개념까지 포함시킨 제도다. 예금통장과 마이너스 통장처럼 노동시간을 저축하거나 빼 쓴 만큼 휴가를 사용하거나 초과근로를 한다는 뜻이다.

저축휴가제가 활성화된 독일은 노동시간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위해 이 제도를 도입했다. 제도 도입을 선도한 폭스바겐은 90년대 초반 세계 자동차산업의 경기불황으로 전체 직원 12만명 중 5만명이 고용위기에 처하자 93년 저축휴가제를 도입하면서 3만명을 구제했다. 노동시간 유연화를 통해 기업의 경기변동 대응능력을 높여 직원의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 보상휴가제와는 또 다른 저축휴가제만의 특징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고용창출 효과와 함께 삶의 질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저축휴가제 도입 논의가 진행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0년 기준 국가별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은 우리나라가 2천193시간으로 34개국 중 1위였다. 가입국 평균 노동시간은 1천749시간으로 우리나라에 비해 444시간 적었다. 하루 8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OECD 가입국에 비해 평균 55.5일, 즉 두 달 이상을 더 일하는 셈이다.

한국은 고용유연화, 유럽은 노동유연화

하루를 거의 직장에서 일과 씨름하며 보내다 보니 일과 가정의 양립은 고사하고 삶의 질도 개선되지 않았다. 최근 복지국가담론과 맞물려 일보다는 개인의 삶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시간에 포함하거나 저축휴가제와 같이 수당(임금)보다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제도 도입 논의가 잇따르는 배경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독일 등 유럽은 경기변동에 대처하는 방식이 다르다. 독일은 주로 고용은 보장하되 노동시간단축과 탄력적 근무제 등 노동시간유연화 기제를 통해 경기변동에 대응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통한 고용유연성 확보가 관행처럼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경기위기 때마다 노동시간을 단축해 일자리를 나누자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대부분 정리해고를 통해 경기악화에 대응했다. 노동시간단축은 으레 임금감소를 동반한다. 노동계는 임금감소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경영계는 정리해고를 선호했다.

그렇다면 저축휴가제는 어떻게 고용보장의 기제로 작동할까. 폭스바겐은 노사합의로 최대 ±400시간, 즉 800시간까지 근로시간계좌를 운용한다. 최대 6개월간은 저축휴가제만을 통해 추가비용 부담 없이 노동시간을 줄이고 늘려 경기변동에 대처할 수 있다.

특히 독일에서 정리해고를 하려면 퇴직금에다, 계좌에 쌓아 놓은 근로시간만큼의 임금을 한꺼번에 지급해야 한다. 경제위기시 자금사정이 어려운 기업들이 이처럼 막대한 비용을 한꺼번에 지급하기란 쉽지 않다. 독일 기업들이 정리해고보다는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고용유지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다.

기업 53% 반대, 직장인 81% 찬성

저축휴가제가 우리나라에서 활용되기는 아직 쉽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보상휴가제와 저축휴가제는 모두 초과근로를 수당으로 주지 않고 휴가로 보상하는 개념을 담고 있다. 임금보다 휴식을 선호한다면 보상·저축휴가제가 보탬이 되지만 통상임금의 1.5배(50% 가산)인 초과근로수당을 선호하는 이는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연차휴가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축휴가제는 언감생심이라는 지적도 있다.

초과근로에도 가산수당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기업으로서는 이점이다. 그러나 경영계 역시 반대 목소리가 높다. 이정일 삼성경제연구소 상무(연구임원)는 "기업 대부분이 인력을 여유 있게 운영하는 경우가 드문데, 저축휴가제를 시행하려면 추가인력 선발에 따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며 "독일은 해고가 쉽지 않아 저축휴가제를 활용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그런 문화가 정착된 수준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문호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소장은 "노동시장의 합리성 측면에서는 고용유연화 대신 노동시간유연화를 선택한 유럽모델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노사 간 신뢰가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기업과 노동자 모두가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상자 인터뷰 참조>

국민 여론은 어떨까. 한 취업포털업체가 조사한 결과로는 기업의 53.3%는 "저축휴가제 도입에 반대한다"고 밝힌 반면 직장인의 81.2%는 "찬성한다"고 답했다. 이 조사는 정부가 2010년 저축휴가제 도입 계획을 밝힌 직후인 같은해 12월 기업 인사담당자 745명과 직장인 698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것이다.

[인터뷰] "정부 법안발의 계기로 연구·논의 활발해져야"

이문호
워크인조직혁신
연구소 소장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유연화가 고용유연화와 같은 개념으로 통용되는 것 같습니다. 잘못된 인식이죠. 노동유연화는 노동시간 유연성, 즉 내적유연성을 뜻하고 고용유연화는 정리해고와 같은 외적유연성을 말합니다. 사람을 자르지 않고 숙련기술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는 노동유연화가 바람직하죠."

이문호(58·사진)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소장은 22일 “노사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저축휴가제 도입과 운영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저축휴가제는 노사 모두에게 이로운 점도 있지만 불리한 점도 있다. 노사가 신뢰를 바탕으로 각자에게 이로운 점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노사 모두가 반대의견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18년간 독일에서 노동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독일 금속노조(IG Metall) 교육위원을 지낸 노동전문가다. 그는 “저축휴가제로 적립한 근로시간을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사용하면 합법적인 생산라인 정지, 즉 파업도 가능하다”며 “노조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경영계가 이런 위험부담을 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반면 노동계는 초과근로수당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업이 저축휴가제와 함께 도입될 탄력근무제를 노동효율화 측면에서만 활용할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장은 “기업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활용해 고용유연성을 확보하는 상황에서 저축휴가제는 노동시간 유연화를 통해 고용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제”라며 “제도 도입을 논의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의 입법발의는 논의를 촉발한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지만 법이 일반 보편성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한계는 있다”며 “구체적인 제도 설계와 운영은 상호신뢰를 전제로 기업 상황에 맞게 노사가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 소장은 “저축휴가제 도입은 노동시장의 문화와 관행, 노사의 인식을 모두 바꿔 가는 과정이기에 다양한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며 “노사가 무엇이 유리하고 불리한지를 세밀하게 따지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제도를 안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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