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은 최근 공중분해 상태다. 올 들어 고용노동부의 국고지원이 전면 중단된 뒤 연구원 소속 연구위원들은 한국노총 사무총국에 파견되는 형태로 뿔뿔이 흩어졌다. 사무총국 체계에 맞춰 급여테이블이 변경되면서 박사·석사급 연구원들에게 지급돼 온 ‘학위수당’이 대폭 삭감됐다. ‘한국노총 정책연구원’이라는 간판은 살아 있지만, 하반기에 노동부 국고지원이 재개되지 않으면 앞으로의 운명을 장담하기 힘들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의 사정도 다를 게 없다. 최근 1명의 연구위원이 충원돼 원장을 포함해 4명의 인력이 연구원을 끌어가고 있는데, 내셔널센터의 브레인이라기엔 연구실적이 초라하다. 정기간행물이나 정기보고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간헐적으로 연구보고서를 낸다. 민주노총의 재정이 나빠지면서 연구원 인력의 월급이 200만원을 넘지 않는다. 연구원을 ‘유배지’라 부르는 자조의 목소리도 나온다.

양대 노총 산하 산별연맹들이 설립한 연구소들이 고군분투 중이지만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매일노동뉴스>가 우리나라 노동조합 싱크탱크 7곳 중 답변지가 수거된 6곳의 연구원장·소장 6명과 연구위원 6명을 서면조사했다. 답변서가 미수거된 금융경제연구소는 홈페이지를 참조했다. 그랬더니 7개 연구소의 평균 상근인력은 2.7명에 불과했다. 대학교수 등 외부 전문가를 비상근 연구위원으로 선임해 연구공백을 메우고 있지만 이런 방식은 한계가 뚜렷하다. 인건비 수준도 높지 않다. 기관별로 편차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월평균 급여가 250만원을 밑돌았다.<표 참조>

자금과 인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질 높은 연구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조사에 응한 연구위원 6명 중 5명이 양대 노총 연구원의 정책역량에 대해 “불만족스럽다”고 답했고, “카운터파트인 사용자단체에 비해서도 정책역량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안재원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연구진영 전체의 역량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에 노동연구기관들이 합력할 수 있는 계기와 목표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노동판 ‘세리(SERI)’는 불가능한가

일반적으로 정책연구원의 성패는 연구원이 시장에 내놓은 보고서가 얼마나 많이 인용되고 활용되느냐에 달렸다. 우리나라 언론에 가장 자주 인용되는 연구소는 삼성경제연구소(SERI)다. 86년 설립된 삼성연은 자본금 600억원, 매출액 1천억원, 사원수 250명 이상의 대기업 집단이다. 노동조합 부설 연구소를 다 합쳐도 도저히 게임이 안 된다.

한겨레경제연구소가 지난해 1월부터 2개월여간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에 인용된 삼성연 관련 보도횟수를 집계한 결과 동아일보 3천488회, 한겨레 1천630회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두 신문에 가장 많이 인용된 노동 관련 연구소는 민간연구기관인 한국노동사회연구소였다. 동아일보에 38회, 한겨레에 312회 등장됐다. 노동조합 부설 연구소 중에는 금융노조 금융경제연구소(한겨레 145회)와 공공서비스노조 사회공공연구소(한겨레 60회) 정도가 체면치레를 했다.

노조 연구소에 인력·재정의 한계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 말고도 문제는 많다. 연구과제의 선택과 집중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어렵게 내놓은 성과물마저 제대로 유통시키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수봉 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원장은 “보고서가 나와도 총연맹 간부들 책상 위에 장식용으로 놓이는 경우가 태반”이라며 “연구과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부터 어떻게 하면 연구성과를 노동현장의 실천적 과제로 연결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동조합이 강점을 갖는 연구과제를 선정해 데이터를 축적하고 적극적으로 통계화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노조 연구소만의 특산품을 개발하고 포장하라는 의미다. 노진귀 전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원장은 “노조 연구소들이 가장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는 데이터는 단체협약”이라며 “산하노조에 일일이 문의해 협약을 받는 수동적 방식으로는 연구가 어렵고, 정보를 받고 분석하는 시스템을 도입해 전문인력 몇 명이 컴퓨터 분석만으로 유의미한 통계를 뽑아내는 수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 노조법은 단위사업장 단협을 노동부에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며 “합리적 교섭을 유도하는 측면에서 정부가 단협분석시스템을 도입하고 노조 연구소에 분석비용을 지원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은 희망사항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에 대한 노동부의 국고지원 중단 사태가 이를 반증한다.

공익재단 세워 운영난 벗어난 독일노총과 WSI

돈 많고 사람 많고, 게다가 노조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덜한 선진국은 노조 연구소도 우리보다 잘돼 있다. <매일노동뉴스>의 서면조사에 응한 6개 연구소 12명 중 6명이 독일 한스뵈클러재단이 운영하는 경제사회연구소(WSI)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았다. 올해로 창립 66주년을 맞은 WSI는 독일노총(DGB)이 세운 공익재단인 한스뵈클러재단의 산하 연구소다. 독일 내 싱크탱크 중에서도 권위와 연륜을 인정받고 있다.

당초 WSI는 독일노총이 직접 관할하는 연구소였다. 그런데 80~90년대 독일노총의 조합원이 줄면서 재정난이 찾아왔고, 노총의 재정 위축은 WSI의 운영에 영향을 미쳤다. 이를 계기로 독일노총은 95년 WSI에 대한 직접 운영을 포기하고, WSI를 독일노총 초대 위원장의 이름을 딴 한스뵈클러재단에 편입시켰다.

WSI의 주요 기구는 크게 세 축으로 구분된다. 공동결정기관·연구기관·장학기관이다. 특히 석박사 과정을 밟는 학생들에 대한 장학사업은 독일에서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한다. 우리나라에 ‘삼성 장학생’이 있다면 독일에는 ‘노총연구소 장학생’이 있는 셈이다. 독일 금속노조(IG Metall) 교육위원을 지낸 이문호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소장은 “장학사업의 확대는 독일 사회에서 노동계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진다는 의미”라며 “노총으로부터 재정이 독립되고, 정파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사업의 자율성을 확보한 점이 WSI의 성공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독일노총의 재정악화로 독립하게 된 WSI가 재정과 사업의 독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WSI를 관할하는 한스뵈클러재단의 재정기반은 독일노총이 아니다. 장학사업 명목으로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경영감사회 재원’을 지원받는다. 독일의 기업법과 노동관계법에 따라 대기업의 경영감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참석하는데, 이들은 대기업으로부터 일정한 금액의 활동비를 지원받는다. 이 돈은 독일노총의 결의에 따라 전액 한스뵈클러재단에 기부된다. 재단 재정의 70%를 차지하는 막대한 규모다.

노동계 싱크탱크 “뭉쳐야 산다”

WSI의 사례는 노조 연구소가 노조로부터 재정과 사업의 독립성을 확보하면서도 대외적인 영향력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론 정부의 지원이나 노조 대표들의 기부와 같은 ‘친노동적’ 사회분위기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정부가 나서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는 우리의 현실과는 멀어도 너무 멀다.

비록 아이디어 차원에 머물러 있지만 우리나라 노조 연구원들은 ‘노동계 통합 노동연구소’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서로 궁핍한 상태로 흩어져 사느니, 아예 살림을 합쳐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다. 황선자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은 “프랑스 등 유럽국가의 경우 여러 개의 내셔널센터가 공동출자해 하나의 통합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다”며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각적 분석이 가능하고, 중복연구에 따른 손실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대안으로 모색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조직적·정치적 견해가 다른 내셔널센터들이 하나의 연구소로 뭉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총연맹별 통합연구소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태현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원장은 “양대 노총 간 이견으로 전면적 통합은 어려울 것”이라며 “총연맹별 통합연구소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계진 금속노조 노동연구원 원장도 “총연맹을 중심으로 규모 있는 노동연구원을 만들고, 산하조직으로부터 연구프로젝트를 받아 독립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연구소의 조직형태 변경이나 재정의 안정화가 이뤄져도, 노동운동에 대한 비전과 전망이 제시되지 못하면 지금의 난국이 계속될 것이라는 근본적 지적도 제기된다. 노동운동이 힘의 논리에 기댄 결과 머리는 작아지고 손발은 과격해진 현실에서, 노조 연구소들이 제시할 수 있는 정책대안이 많지 않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제갈현숙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자본과 국가가 대학이나 민간연구소를 동원해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생산하는 데 비해 노동의 대응은 매우 미약하다”며 “하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이곳에서 자기 비전과 전망을 보게 된다면 당장의 조건이 부족하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조직되거나 활성화되지 않겠냐”는 메시지를 노동계에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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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실장

“연구인력 육성 시급 … ‘민주노조 키드’ 키우자”

“헐리우드 키드 말고 ‘민주노조 키드’를 육성해야 합니다. 사명감으로 연구했던 1세대 진보적 교수들이 은퇴를 앞두고 있고, 2세대는 참여보다는 훈수에 무게를 두고, 30~40대로 이뤄진 3세대들은 먹고살기 힘든 노동공부를 기피하고 있어요. 불과 몇 년 뒤에 노동계가 설문조사 하나 맡길 사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김종진(39·사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실장은 지난 21일 오후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노조들은 창립기념일에 맞춰 유명메이커 등산복을 구매하는 것은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노조의 중장기적 발전을 위한 연구사업에 들어가는 돈은 너무 아까워한다”며 “그 결과 노동계 내부의 연구역량이 바닥을 쳤고, 한국노동사회연구소나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같은 외곽단체들이 후려치기 단가를 받아 가며 보고서를 쓰고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우리 같은 민간단체 연구원들은 한 달에 150만원 받고 일해요. 프로젝트 연구를 해 봤자 별로 남는 게 없어요. 돈을 벌려면 차라리 강연을 뛰는 게 낫죠. 그래도 중요한 일이니까 가급적이면 노조가 진행하는 연구사업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그는 “양대 노총 정책연구원에 테이블 하나 놓고 노동경제학이든 노동사회학이든 노조 관련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며 “이렇게 형성된 네트워크가 나중에 노조에 득이 되지 실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조합 연구소들의 연구 활성화를 위해서는 ‘패키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제가 서비스업종 감정노동에 대해 연구를 해 왔는데요. 연구에 앞서 조합원 설문조사를 하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조합원 교육을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감정노동이 단체교섭 쟁점이 될 수밖에 없어요. 실제 ‘감정노동 수당’을 신설하는 결실을 맺었죠. 올해는 ‘감정노동 휴가’가 교섭 쟁점으로 떠오른 상태입니다. 실태조사와 조합원 교육, 노사 교섭이 패키지로 묶일 때 연구 성과의 효과는 배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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