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밤 통합진보당 전국운영위원회가 인터넷 다음 카페를 통해 전자회의를 개최해 공동대표 4인과 비례대표 1~3번 사퇴를 결정했다. 전자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전국운영위원회 다수의 의견에 뜻을 달리하는 당원들이 위원회 회의를 방해하고, 운영위원들의 회의장 입장을 몸으로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진보당 당헌에 따르면 전국위원회는 ‘중앙위원회 다음의 최고 대의기관’이다. ‘전국의 모든 당원’으로 구성되는 전국당원대회가 있고, 이어 중앙위원회가 ‘당의 최고대의기관’으로 규정돼 있다. 전국운영위원회에서는 ‘①당규의 제정과 개정 ②중앙위원회에서 위임한 안건의 처리 ③주요정책 및 당 방침의 수립 ④공직선거 후보의 인준 ⑤시·도당의 설치 해산에 대한 인준 ⑥예산과 결산의 심의·의결 ⑦공동대표단에서 제출한 안건의 처리 ⑧사무총장 및 정책위 의장 등의 인준 ⑨기타 당헌·당규에서 정한 권한’을 논의하고 결정한다.

중앙위원회가 갖는 권한이 ‘①강령의 제정과 개정 ②당헌의 제정과 개정 ③전국운영위원회에서 제출한 안건의 심의·의결 ④ 기타 중요한 결정’임을 고려할 때 전국운영위원회가 당의 실질적인 대의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보당 사태, 2005년 민주노총 대대 떠올리게 해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회의가 지난 4일과 5일 당권파를 지지하는 소수 당원들(이들은 운영위원이 아니다)에 의해 집요하게 방해받았고, 이들의 실력저지로 운영위원들이 결국 회의장에서 회의를 열지 못하고 전자회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 파행을 겪은 것이다.

이날 사태는 노사정위위원회 참여를 둘러싸고 파행을 거듭했던 2005년 3월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연상시킨다. 당시 참여 찬성파가 대회의 다수를 이루자, 반대파에서 전노투(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담합 분쇄를 위한 전국 노동자 투쟁위원회) 등 대의원이 아닌 이들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대회를 무산시켰다.

2005년 3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무산시킨 세력은 ‘PD강경파’였고, 2012년 5월 진보당의 운영위원회를 무산시킨 세력은 ‘NL강경파’라는 정파적인 차이가 있을 뿐 그 행태나 논리는 대동소이하다. 2005년 3월에는 '조합원 생존권'이었다면, 2012년 5월에는 '당원 민주주의'다. 회의 다수파가 “역사·민중·운동을 배신했다”는 소수파의 비판 논리도 동일하다.

당이나 노동조합 같은 현대적 결사체의 공식의결구조에서 다수결의 원칙이 보장되고 존중받지 못한다면 조직 민주주의는 붕괴할 것이다. 2008년 민주노동당에서 분당해 나간 세력의 치명적인 약점은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에 대한 그들의 집착보다도 의사결정구조에서 다수가 결정한 사항을 부정(否定)했다는 데 있었다. 형식이 정상적인 의사결정구조에서 다수파가 추진하는 내용이 소수파의 입장에서 볼 때 비정상적이라고 판을 깬다면, 정당 민주주의나 노조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10명의 민주주의와 1만명의 민주주의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의제가 필요한 것이다. 특히 민주집중제가 요구되는 운동조직에서 대의기관의 다수결을 부정하는 것은, 주장과 내용의 정당성을 떠나 조직의 성원들이 지향하는 운동 자체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형식’ 없는 ‘내용’은 존재할 수 없다



진보당 운영위원회에서 의장을 맡은 이정희 공동대표는 표결하자는 운영위원 다수의 의견에 맞서 “만장일치가 필요하다”며 온갖 화언교어(花言巧語)로 12시간 넘게 표결을 방해했는데, 이런 태도 역시 회의 진행자로서의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 엄중히 비판받아야 할 사안이다. 만장일치는 자발적일 때 순기능을 발휘하지만, 강요될 때는 조직을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내 주장의 내용이 맞으면, 조직의 형식과 절차를 방해하고 무너뜨려도 된다는 태도는 현대사회의 원리와 상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대의를 무너뜨리고 자유주의 정치세력인 참여당과의 합당을 '다수결'로 밀어붙인 세력이 누구였던 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부실·부정선거 파문으로 진보당이 웃음거리가 된 것은 물론,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운동진영의 권위도 더욱 추락했다. 운동 권위의 회복, 그것은 대의기관의 다수결 원칙 존중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다. ‘형식’이 튼튼하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내용’도 버틸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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