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투코리아에서 신발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19일 서울 성수동 본사 건물 앞에서 정리해고 철회와 고용보장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85명이 건물 4층과 5층의 생산라인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정기훈 기자

아웃도어 업계의 초고가 마케팅을 비꼰 ‘등골페이스’라는 말이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똑같은 브랜드의 아웃도어 점퍼를 교복 위에 걸친 아이들은 “교육이 산으로 가니 등산복을 입고 등교한다”며 자조했고, 행여 자식들 기죽을까 비싼 점퍼 사다 바치느라 부모들은 말 그대로 등골이 휘었다.

아웃도어 의류나 용품에 대한 선호는 애·어른을 가리지 않는다. 히말라야산맥 에베레스트의 험준한 빙벽을 직접 오르지는 못하더라도, 첨단 소재와 최신 디자인을 접목한 등산복에 등산화 차림이면 ‘내가 바로 조인성’이라는 착각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제품 자체 보다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구매심리와 아웃도어 업계의 프리미엄 마케팅 전략이 만났으니, 바야흐로 아웃도어 전성시대다.

가파르게 성장해온 아웃도어 산업

국내 아웃도어 시장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시기는 90년대 중반이다. 국내서 가장 오래된 아웃도어 브랜드는 66년 등산양말 제조업체인 한고상사가 만든 토종 브랜드 에델바이스다. 그 뒤 72년 K2·73년 코오롱스포츠·82년 에코로바·91년 영원무역·96년 블랙야크·2001년 더웨스트우드·2003년 라페·2005년 노스랜드 등이 잇따라 론칭했다.

국내 브랜드는 97년 노스페이스와 98년 컬럼비아스포츠웨어 같은 글로벌 브랜드의 국내 상륙 이후 입지가 좁아졌다. 현재는 코오롱스포츠와 K2코리아 정도가 글로벌 브랜드와 어깨를 견주는 수준이다.

아웃도어 업계는 올해 총 매출 목표액을 지난해보다 30% 늘어난 5조3천억원으로 잡았다. ‘등골페이스’라는 오명을 듣고 있는 노스페이스가 10년 넘게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스페이스는 지난해 업계 최초로 매출 6천억원을 돌파한 데 이어 올해도 10% 이상 매출 목표를 올려잡았다.

2·3위 업체는 코오롱스포츠와 K2코리아로 국내 브랜드들이다. 지난해 매출 5천억원을 달성한 코오롱스포츠는 올해 6천억원 돌파를 목표로 잡았다. K2는 지난해 매출 4천100억원을 달성했다. 올해 목표는 5천500억원이다. K2코리아는 신규 브랜드인 아이더를 육성하기 위한 공격적 마케팅 계획도 내놓았다. 이 밖에 블랙야크·컬럼비아·네파·밀레·라푸마·레드페이스·에코로바 등이 업계 매출 4~10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 가운데 빅5 브랜드의 매출이 전체 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 등에 따르면 국내 아웃도어 시장 규모는 2006년 1조원에서 2009년 2조2천억원, 2010년 3조2천500억원, 지난해 4조3천700억원으로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시장 규모는 지난해 매출을 기준으로 볼 때 미국(11조원)과 유럽연합(9조원)에 이어 세 번째 규모다.

수입·OEM이 대부분, 국내 산업기반 취약

이들 업체가 국내 고용과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각 업체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빅5 업체 중 국내 공장을 운영하는 업체를 찾아보기는 거의 어렵다. 선두 업체인 노스페이스는 중국과 방글라데시·베트남·인도에서 생산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수입사인 골드윈코리아가 수수료와 로열티 등을 지불하고 제품을 들여온다.

골드윈코리아는 미국 노스페이스사에 순매출의 5%를 수수료로, 순매입액의 7%를 디자인사용료로 지불한다. 또 매년 순매출의 5%를 러닝개런티와 상표권 로열티 명목으로 일본 골드윈에 지불하고 있다. 골드윈코리아가 2006년부터 5년간 일본과 미국에 지불한 로열티와 수수료는 1천461억원에 달한다. 10대 청소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제2의 교복’이 된 노스페이스이지만, 국내 고용이나 제조업 부문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

토종 업체로 분류되는 코오롱스포츠나 K2코리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코오롱스포츠는 소재·디자인·패턴 등 상품 기획을 위한 핵심 부문만을 직접 관할하고, 생산은 국·내외 협력업체와 아웃소싱 계약을 맺고 있다. K2코리아도 서울 성수동 공장에서 등산화 일부를 생산할 뿐, 의류를 포함한 나머지 제품은 중국 톈진 공장과 북한의 개성 공장에서 만들고 있다. 이들 업체는 ‘토종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내세운 애국심 마케팅 덕을 톡톡히 봤지만, 정작 국내 산업발전에 대한 기여도는 기대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국내 기업인 블랙야크나 미국 투자 한국법인인 컬럼비아스포츠웨어코리아도 비슷한 상황이다. 서울 가산동에 본사를 둔 블랙야크는 중국시장 공략에 공을 들여왔다. 이를 위해 본사는 디자인·품질 등을 주로 관리하고, 제품은 중국 현지 제조업체에 주문자상표부착제조(OEM) 방식으로 위탁하고 있다. 컬럼비아의 경우 한국의 하청업체를 거쳐 생산된 제품이 미국 등으로 역수출되지만, 국내 고용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 수준은 아니다.

토종브랜드 K2의 예고된 구조조정

이들 빅5 업체 가운데 국내에서 공장다운 공장을 운영해온 곳은 K2코리아가 유일하다. K2는 중국 톈진 공장과 북한 개성 공장에서 산업화와 레저용 의류·등산용품 등을 생산하고, 서울 성수동에 있는 국내 공장에서 등산화를 만들었다. 하루 평균 900족의 등산화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K2는 다음달 31일까지만 성수동 공장을 운영한다. 오는 6월부터는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등산화 일체를 생산한다는 구조조정 계획을 내놓았다. 국내 공장의 가동 중단 이유는 ‘비용 절감’이다. 동남아의 싼 인건비를 찾아 떠나겠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터질 일이 이제 터진 셈이다. 아웃도어 업계가 국내에 제조기반을 두지 않고 수입이나 OEM에 의존해온 현실을 감안하면, 예고된 구조조정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회사측 관계자는 직원들을 모아 놓고 “한국 사람 한 명 쓸 돈이면 인도네시아 사람 여러 명을 쓸 수 있다”며 구조조정의 목적이 인건비 절감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구조조정 물망에 오른 성수동 공장 생산직 노동자는 총 93명이다. 이 중 8명이 명예퇴직했고, 현재 85명의 노동자가 국내공장 가동 유지와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이고 있다.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은 49.3세, 기술 수준에 따라 100만~150만원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 K2의 지난해 매출 가운데 생산직 노동자의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다. 매출 대비 생산직 인건비 비중은 2007년 3.5%에서 2009년 2.9%, 지난해 1.9%로 점점 줄었다. 매출이 급증한 데 비해 인건비는 제자리걸음을 한 탓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구조조정의 진짜 이유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은 “인건비가 갑자기 높아진 것도 아니고 영업이익이나 수익률이 낮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회사가 구조조정을 강행한다면 다른 이유를 의심해 볼 수 있다”며 “가령 회사가 부동산 시세 차익 등을 염두에 두고 국내 공장 폐쇄를 추진한다거나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 구로나 가산동 일대에 공단 재구조화 바람이 불면서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서고, 그 일대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업체들이 부동산 쪽으로 눈을 돌리면서 정리해고를 포함한 구조조정에 나섰던 현상이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사라지는 ‘Made in Korea’

아웃도어 업계에 불고 있는 스타 마케팅은 K2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회사측에 따르면 전체 매출의 3~5%이 마케팅 비용으로 지출된다. 생산직 전체 인건비의 2배 이상이 광고비로 쓰이는 것이다. 광고업계에 따르면 K2 모델인 원빈의 모델료는 7억원, K2가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있는 아이더의 모델인 이민호와 윤아는 각각 7억원과 3~4억원 수준의 모델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적 기반이 취약한 아웃도어 업계에서 ‘Made in Korea’라는 브랜드 정체성을 등에 업고 성장해온 K2가 업계의 유행을 쫓아 이미지 마케팅에 무게를 싣는 모양새다. 이에 대해 성수동 제화업계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낮은 진입장벽으로 인해 너나없이 아웃도어 업계에 진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브랜드인 K2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거품이 낀 고가전략보다는 명품전략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해삼 서울성수동제화협회 사무국장은 “K2 아웃도어와 등산화가 명품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국내 기능공의 우수한 바느질과 검수, 국내 제조기술의 우수함 때문이다”며 “국내 제조기반을 폐쇄하고 기능공들을 해고했을 때 발생하는 유무형의 손실이 너무 크다”고 설명했다. 성수동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꿰맨 등산화는 이대로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

[상자기사] 난생 처음 '투쟁 머리띠' 두른 등산화 장인들의 눈물

지난 26일 저녁 지하철 2호선 성수역 앞. 한 무리의 사람들이 ‘투쟁’이라고 적힌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서 있다. 얼핏 봐도 50세를 전후한 중년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이다.

“공장은 없애면 안 된다고 아침에도 외치고, 점심에도 외치고, 저녁에도 외치는데. 암만 시끄럽게 해도 회사가 들은 척을 안 해요.”

회사의 계획대로라면 오는 6월 정든 공장을 떠나야 하는 K2코리아 성수동 공장의 노동자들이다. 회사는 비용절감과 생산라인의 일원화를 이유로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다. 6월1일부터 성수동공장의 생산라인을 폐쇄하고,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원스톱(One-stop)’ 라인을 가동한다는 것이 회사의 계획이다.

성수동 공장은 쉽게 말해 조립 공장이다. 해외 공장과 국내 하청업체에서 신발의 깔창과 갑피(신발의 형태를 이루는 윗부분)를 납품받아 이 공장에서 완성품을 만드는 것이다. 깔창과 갑피를 본드로 붙이고, 신발의 형태를 잡아주는 틀인 ‘골’에 끼워 모양을 잡는다. 이태리 장인 못지않은 ‘한 땀 한 땀’ 바느질 기술도 동원된다. 두드리고, 문지르고, 털어내고…. 여러 번의 수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한 켤레의 등산화가 완성된다.

회사측은 이 같은 생산공정이 과다한 물류비용을 발생시키고, 국내 노동자의 인건비 부담이 커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등산화 일체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이다. 깔창과 갑피를 비롯한 자제 공수부터 신발 제작까지 한 공장에서 모두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미 인도네시아 노동자의 채용절차까지 마무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토종회사 K2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라’던 회사가 국내 공장을 폐쇄하다니요.”

올해로 13년째 근무하고 있다는 노경순(51)씨는 “갑상선암 수술받고 한 달 만에 다시 나와 일하고, 아픈 아기를 맡길 곳이 없어 공장에 뉘여 놓고 일을 한 적도 있다”며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회사에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일해 왔는데, 배신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당초 회사는 신발사업본부 노동자 93명을 정리해고할 방침이었다. 올해 3월 노동자들에게 해고 예고통보를 하고 희망퇴직을 접수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8명의 노동자가 일터를 떠났다.

잘나가는 등산화 업체가 노동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한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이를 비판하는 언론보도가 잇따랐다. 특히 K2가 지난해 고용노동부 주관 ‘고용창출 100대 우수기업’에 선정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회사는 정리해고 방침을 철회했지만 그 대신 전환배치 방안을 들고 나왔다. 남은 85명의 노동자 중 10명은 인도네시아 공장으로, 12명은 개성공단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나머지 노동자들은 신발AS·의류AS·의류검사·신발개발·직영매장 등에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등산화만 만들어 온 자신들이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사실상 고용불안 상태에 놓인 성수동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부분은 중년여성이다. 평균연령은 49.3세다.

올해 입사 9년차인 김선자(49)씨는 “식구들을 여기에 놔두고 외국말도 못하는 내가 혼자 인도네시아에 갈 수 있겠냐”며 “난생 처음 투쟁 머리띠를 매고 길거리에 나오니 슬프기 보다는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지역 노동계는 회사측이 본격적인 정리해고에 앞서 ‘해고 회피 노력’의 일환으로 실효성 없는 전환배치 방안을 들고 나왔다고 보고 있다. 문종찬 서울동부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최근 법원은 정리해고의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에서 ‘긴박함’을 고려하지 않고 사용자들에게만 유리한 판결을 내놓고 있다”며 “국내 공장을 유지하더라도 경영상 압박을 받지 않는 K2 회사측이 비난 여론을 의식해 시간벌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