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한다. 정파들의 내부 분열, 지리멸렬한 산별노조운동, 낮은 노조조직률, 남성중심주의, 대기업·정규직 이기주의, 사회적·운동적 권위의 상실, 침로(針路)를 상실한 노동자 정치세력화, 양대 노총의 분열…. 리스트를 만들자면 끝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국 노동운동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1920년대 출현했던 최초의 노동자조직들인 조선노동공제회·조선노동대회·조선노동연맹회·조선노동총동맹은 일제의 탄압, 내부 분열, 사상 대립, 지나친 지식인 주도성 따위의 이유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광복 직후 45년 11월 만들어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도 냉전체제의 개시, 미군정의 탄압, 우익단체인 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의 공격, 남조선노동당에의 지나친 종속으로 1948년 5월 사실상 소멸했다.

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노총은 유일한 합법적 전국조직이 되지만, 이승만 독재에의 종속, 파벌 싸움, 부패 간부들의 난립으로 ‘어용노총’으로 전락했다. 59년 10월 대한노총에 대항해 전국노협이 출범하고, 60년 4월 항쟁을 계기로 새롭게 노조들이 결성되면서 조직률이 급증했다. 그러나 61년 5월 박정희가 주도한 반동적 군사쿠데타로 노동운동은 된서리를 맞았다.

60년대와 7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노동계급의 성장을 가져오면서 계급모순을 격화시켰다. 69년 대한조선공사 투쟁에 대한 긴급조정권 발동, 70년 전태일의 분신, 72년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의 출범과 노동쟁의 폭증, 79년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투쟁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70년대는 탄압의 시기이도 했지만, 민주노조운동이 싹을 틔운 시기이기도 했다. 원풍모방·동일방직·YH무역·콘트롤데이타·청계피복노조 등이 앞장섰다.

80년 전두환 독재체제의 출범은 ‘서울의 봄’으로 고양되던 노동운동과 민주노조운동의 싹을 잘라 버린 듯했으나, 언 땅 밑에서 새로운 씨앗이 꿈틀대고 있었다. 84년 6월 대구와 부산의 택시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고, 85년 대우자동차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 노동자 구속에 항의하는 인근 사업장들의 동조파업이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재야 노동조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87년 6월 항쟁에 이어 노동자대투쟁이 폭발했고, 7월에서 9월까지 3개월 동안 무려 3천건이 넘는 파업이 전국을 휩쓸었다.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무노조상태였던 대기업과 사무직·전문직 사업장에 노조가 결성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이 빠르게 세력을 키웠다. 이 흐름은 90년대 들어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대기업연대회의·ILO 기본조약 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 공대위)·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를 거쳐 95년 11월 민주노총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민주노총 운동의 성장은 한국노총의 개혁을 자극했고, 이로써 한국노총도 ‘어용노총’의 오명을 조금씩 극복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대투쟁은 96년 12월과 97년 1월 양대 노총의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으로 정점에 달했다.

97년 11월 IMF 관리체제로 편입되면서 시련을 맞이하는 듯했던 노동운동은 97년 국민승리21을 거쳐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시키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깃발을 전면에 내걸었다. 또한 98년 보건의료노조의 출범을 시작으로 산별노조 건설이 노동조합운동의 대세를 이루게 됐다.

21세기 들어 노동운동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지만, 역사는 노동운동이 상승할 때가 있으면 하강할 때도 있고, 고양할 때가 있으면 위축될 때도 있음을 가르쳐 준다. 한국 노동운동은 식민지·제국주의·전쟁·독재·군사쿠데타의 폭압을 거치면서 살아남았고, 이를 통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은 자기 역사를 갖게 됐다. 지식인과 명망가에 종속된 엘리트 운동이었다면 벌써 단절됐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에 뿌리내려 온 대중운동이었기에 영욕(榮辱)을 교차하면서 성장·발전해 왔던 것이다.

위기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위기에 맞서려는 노동자들의 의지, 흩어진 힘을 모으려는 대중조직의 단결력, 현실에 대한 솔직하고 정확한 진단, 이를 토대로 한 올바른 전략·전술의 수립, 그리고 대중의 신뢰와 조직의 권위를 회복시킬 지도력의 구축이다. 근거 없이 낙관할 때도 아니지만, 실천과 노력 없이 비관할 때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노동운동은 성공과 패배, 도약과 침체를 거듭하면서 발전해 왔던(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398쪽)” 것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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