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아파트관리사무소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청소노동자 A(50)씨는 B소장에게서 음담패설 문자를 받고, 잠자리를 요구받았다. A씨는 회사에 청소구역 변경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은 A씨에게 "소송을 걸어 판결문을 받아오라"고 요구했다. B소장은 "힘든 구역에 박아 놓겠다"며 윽박질렀다. 이후에는 이혼녀인 A씨에 관한 이상한 소문마저 돌았다. A씨는 "이 나이가 되도록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막힌 일을 겪어야 하는 게 울화통이 터진다"며 "더 이상 참다가는 화병이 생길 것 같아 여성단체와 법적조치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민간협회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던 C(48)씨는 상사 D씨로부터 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했다. D씨는 C씨의 주변을 지나갈 때마다 C씨의 몸을 만졌다. 계약직인 C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피해다니는 것뿐이었다. 성희롱이 몇 년째 계속되자 C씨는 D씨에게 시정을 요구했다. 그 결과 "시간제로 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C씨는 "성희롱으로 고발하겠다"고 맞섰지만 D씨는 "마음대로 하라"며 비웃었다. 결국 C씨는 협회를 스스로 그만뒀다. 그는 "그간 참아 왔던 스트레스 때문에 현재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다"며 "회사는 그만뒀지만 지금이라도 가해자에 대해 단죄할 수 있는 방안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E(28)씨는 100여 번의 낙방 끝에 금융업계에 계약직으로 취업했다. 힘들게 일자리를 구한 만큼 기대도 컸다. 그러나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E씨는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산다. 회식 자리에만 가면 돌변하는 상사 F씨 때문이다. 이직을 고민할 정도다. F씨는 술만 먹으면 E씨에게 스킨십을 하면서 모텔에 가자고 강요했다. 요령껏 피하고는 있지만 회식자리에 가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E씨는 "어렵게 얻은 직장인 데다 경력을 고려하면 일을 그만둘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직장 내 성희롱, 노동통제 수단으로 악용

일터에서 여성노동자가 겪는 성희롱은 '고용'과 직결된다. 성희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피해자는 일을 포기하거나 업무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대부분이 직장 내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폭력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성희롱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확인시키고, 그 과정을 통해 다른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통제하게 된다. 대부분의 성희롱 피해자들은 퇴사 후 뒤늦게 대책을 찾거나, 아니면 이조차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지난해 실시한 여성노동상담 결과에 따르면 근로조건을 상담한 재직자 비중이 62.1%, 모성권을 상담한 재직자 비중은 96.4%로 나타났다. 반면 직장 내 성희롱 상담자의 재직자 비중은 58.3%로 가장 낮았다. 성희롱은 근속연수 1년 미만(54.7%)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근속연수가 길어질수록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직장 내 성희롱이 권력관계로 인해 발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민주노총과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이 지난해 8월 여성노동자 1천652명을 대상으로 벌인 실태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규직(3.11건)보다 비정규직(3.76건)이 더 많은 성희롱을 당했다. 간접고용일 때가 4.02건으로, 직접고용일 때(3.13건)보다 많았다. 공감은 "비정규직이고 간접고용일수록 일상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성희롱보다 의도적이고 직접적인 성희롱을 겪고 있었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소극적인 방식으로 대처했다. 피해자가 성희롱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일수록 악랄해지는 성희롱

그 극명한 사례를 보여 준 것이 '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 부당해고 사건'이었다. 박아무개(47)씨는 14년 동안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했다. 홀로 딸 둘을 키우는 그에게 일은 유일한 생존수단이었다. 박씨는 2009년부터 상사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당했다. 처음엔 박씨도 참았다. 하지만 상사는 딸과 함께 있는 집에까지 전화를 걸어 “너희 집에 가서 자고 싶다”고 했다. 박씨는 이를 동료에게 알렸다. 그런데 회사는 오히려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며 피해자를 해고했다. 박씨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자, 회사는 폐업신고를 한 뒤 그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을 모두 고용승계했다.

가해자가 일터에서 일할 동안 박씨는 온갖 수모를 당했다.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그에게 현대차 관리자들은 "다른 여성에게는 뽀뽀도 했는데 왜 너만 난리냐"고 핀잔했다. 1인 시위를 막는 용역에게 폭행을 당해 전치 4주의 부상도 입었다. 심지어 현대차측은 “박씨의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내용의 문서를 만들어 국회에 뿌렸다. 박씨는 공장 내 다른 피해여성에게 연대를 요청했지만 “참자”는 답변만 돌아왔다.

노동계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투쟁에 함께한 한 노조간부는 "노동계에서조차 부당해고에 맞선 비정규직의 원직복직 투쟁을 노동문제로 보지 않고 한 여성의 사소한 감정싸움으로 치부했다"며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지는 싸움이니 실현 가능한 큰 싸움에 집중하라는 충고로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작은 꽃 아픔으로 피다

박씨가 대리인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광장에서 농성을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던 많은 여성들이 농성에 필요한 물품을 들고 찾아왔다. 그의 투쟁에 공감하는 개인과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성희롱 및 부당해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지원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작은 꽃 아픔으로 피다’라는 투쟁 이름도 만들었다. 박씨는 지난해 11월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성희롱으로 인한 정신적 상해(우울증)도 산재"라는 승인을 이끌어 냈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산재인정은 2000년 새마을금고에서 발생된 성희롱 사건이 있다. 당시는 신체 상해에 대해 산재를 인정받았다. 정신적 상해를 산재로 인정받은 것은 박씨가 처음이었다.

지난해 11월30일 세계 곳곳에서는 현대차를 규탄하는 '전 세계 동시다발 1인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에서는 전미자동차노조(UAW)가 미국 전역의 현대차 영업소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였다. 결국 현대차는 박씨가 싸운 지 1년4개월 만인 지난해 12월 가해자 처벌과 원직복직을 합의했다. 금속노조 조합원이기도 한 권수정 대리인은 “직장 내 성희롱이 노동자에게 신체적·정신적으로 유해한 작업환경을 만들어 노동권과 건강권을 침해하는 범죄임을 산재승인으로 확인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며 “하청노동자일지라도 성희롱을 참으며 살 수 없다는 사회적 상식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박씨의 투쟁 과정에서 법과 제도는 유명무실했다. 여성가족부는 "성희롱 예방교육을 담당할 뿐"이라며 책임을 미뤘다. 국가인권위는 “성희롱으로 인한 고용상의 불이익”이라며 “사측과 가해자에게 1천800만원의 피해배상을 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사측 관계자는 이를 모두 무시했다. 고용노동부는 "박씨를 고용했던 하청업체가 폐업신고를 해서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 사이 박씨는 인권위·노동부·검찰·근로복지공단 등에서 계속 피해상황을 증언하며 여러 번 같은 조사를 받아야 했다. 피해자는 있으나 누구도 처벌받지 않은 성희롱 사건의 전형을 보여 준 것이다.

민주노총 ‘성희롱 금지법 제정’ 투쟁 나서

사실 노동계도 무기력했다. 산하조직의 여성사업 담당자들이 개인적으로 연대하긴 했지만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차원의 조직적인 연대는 부족했다. 민주노총은 박씨의 투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뒤에야 ‘민주노총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박승희 민주노총 여성위원장은 "명백한 비정규직의 부당해고 문제임에도 초반에 이에 대한 공감대가 만들어지지 못했다"며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조직 내부에 대해 냉철히 성찰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권수정 대리인은 "성희롱은 근로조건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직위를 이용해 직원이나 부하직원을 상대로 행하는 구조적인 폭력으로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성희롱을 생존권과 직결된 고용문제로 바라보는 인식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여성노동자의 성희롱이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될 때 피해자는 거대한 권력구조와 노동문제, 가부장적 문화 등에 맞서 홀로 싸워야 한다. 고용이 불안정한 여성노동자들은 성희롱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이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가칭)성희롱 금지법 제정 투쟁'을 선포한 이유다. 윤지영 변호사(공익변호사그룹 공감)는 "특별법을 제정해 성희롱 가해자를 '사용자·근로자·해당 사업의 업무관련자'로 확대하고, 책임부처를 일원화해 가해자와 사용자에 대한 처벌수위를 높여야 한다”며 “특수고용노동자와 비정규직 등 노동권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는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상자 인터뷰] 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 피해자

"정년퇴직 할 때까지 당당히 일해야죠"

"긴 시간 함께 싸워 준 고마운 분들을 위해서라도 당당히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일합 겁니다."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성희롱 부당해고 피해자 박아무개(47)씨는 지난 22일 <매일노동뉴스>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직장 내 성희롱을 산재로 인정받았는데,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이 권리를 찾는 데 힘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씨는 올해 2월 현장에 복귀했다. 동료들은 그를 불편해했다. 박씨는 "처음에는 말도 안 걸었는데 지금은 일을 위한 최소한의 대화는 나누고 있다"며 "관리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장분위기로 인해 원래 일상으로 복귀하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가해자의 부인과 매일 한 팀에서 함께 일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가해자는 해고를 당했지만, 박씨에게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 박씨는 성희롱을 당했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여전히 힘들다고 했다. 그러면서 “힘들 때면 투쟁을 함께했던 동지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며 “안면부지의 시민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아 감사하고 행복한 투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투쟁으로 올해 3·8 여성의 날을 맞아 민주노총의 ‘모범조합원상’과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성평등 디딤돌 상’을 받았다.

박씨는 "성희롱은 정규직과 달리 힘없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성희롱이 묵인되는 사업장은 다른 노동자들에도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만큼 노동계가 성희롱을 노동의 문제로 바라봐 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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