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계는 무슨 일만 나면 국제노동기준 운운한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노동기준은 국제노동기구(ILO)의 노동기준 협약들이다. 기자회견장에서 ILO에 제소하겠다는 이야기도 자주 한다. 그런데 정작 국제노동기준이 무엇인지는 국제담당자들을 빼면 아는 이가 별로 없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혼란을 겪으며 1919년 출범한 ILO는 지금까지 189개의 협약과 201개의 권고를 만들어 국제노동기준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99년에는 189개 협약 가운데 8개를 기본협약으로 선정해 경제발전 정도나 회원국 정부의 비준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나라, 모든 사업장에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한국, ILO 노동기준의 ‘후진국’ 

우리가 국제노동기준이라고 하면, 넓게는 189개 협약과 201개 권고를 뜻하고, 좁게는 8개 기본협약을 뜻한다. 한국 정부는 전체 협약 189개 가운데 28개를, 기본 협약 8개 가운데 4개만을 비준해 국제노동기준 후진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ILO 협약 189개 가운데 무려 26개가 하루 8시간 노동이나 야간노동 규제 등 노동시간과 관련돼 있다. 그중 한국 정부가 비준한 것은 충격적이게도 단 1개밖에 없다. 이런 현실은 한국 노동자들이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이유를 국제노동기준의 측면에서 잘 드러내 준다.

ILO 기본협약 8개는 △제87호 결사의 자유 △제98호 단체교섭권 △제29호 강제노동 △제105호 강제노동 폐지 △제138호 취업 최저 연령 △제183호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철폐 △제100호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111호 고용과 직업에서 차별대우에 관한 협약이다. 이 가운데 한국 정부는 제87호와 제98호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에 관한 협약, 제29호와 제105호 강제노동의 폐지에 관한 협약 등 4개 기본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결사의 자유(제87호)와 단체교섭권(제98호)에 관한 ILO협약을 모두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미국 두 나라뿐이다. OECD 회원국 중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협약 제29호와 제105호를 모두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뿐이다.

ILO 기본협약을 4개 이하로 비준한 나라는 창피스럽게도 한국을 비롯해 14개 나라다. 4개를 비준한 나라가 한국·바레인·중국·인디아·오만·동티모르 등 6개국이고, 3개를 비준한 나라가 소말리아, 2개를 비준한 나라가 미국·브루나이·미얀마 등 3개국, 1개를 비준한 나라가 솔로몬군도, 하나도 비준하지 않은 나라가 몰디브·마샬 군도·투발루 등 3개국이다. 30개가 넘는 OECD 회원국 가운데 ILO의 189개 협약 중 한국 정부가 비준한 28개 이하로 비준한 나라는 아이슬란드(24개)와 미국(14개)뿐이다.

총선 공약에 ILO 협약 비준 넣어야

사정이 이러한데도 한국 사회에서 ILO 협약, 특히 기본협약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노동의 관심이 정부보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제87호 결사의 자유 협약과 제98호 단체교섭권 협약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한국의 노동권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장에서 자주 써먹는 약방의 감초임에도 불구하고, 양대 노총의 대의원대회 같은 공식결의기구에서 협약의 비준과 관련해 정식 요구와 사업을 결의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했다.

특히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맞이해 국제수준에 현저히 못 미치는 한국의 노동권을 개선할 좋은 기회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한국노총이 민주통합당에,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에 ILO 협약 제87호와 제98호의 비준을 정식 공약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는 소식도 들어보지 못했다.

ILO의 국제노동기준에 대해 자본이야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고, 정부는 국제사회 면피용으로 수동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가장 열심히 챙겨야 할 노동은 안타깝게도 기자회견용(用)으로만 접근할 뿐이다. 모든 정당이 ‘노동존중’을 선거 공약으로 제기하고 있는 이때, ‘겉절이’가 될지라도 ILO 기본협약 비준을 각 정당의 공약집에 챙겨 넣으려는 노력을 조직노동이 해야 하지 않을까.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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