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삼성전자·하이닉스·페어차일드코리아 등 반도체 사업장에서 벤젠을 비롯한 발암물질이 검출됐다고 지난 6일 발표했다. 실태조사는 2009년부터 3년간 이들 회사의 웨이퍼 가공라인과 반도체 조립라인에서 이뤄졌다.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가공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삼성백혈병 사건에서 보듯 가공을 위해 사용하는 화학물질 때문에 백혈병 등 각종 암이 발병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전제가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유해 화학물질을 쓰지 않더라도 반도체를 생산하면 발암물질도 함께 생산된다는 뜻이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모든 사업장에서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다는 끔찍한 상상도 개연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검출된 발암물질이 미미한 수준이어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과연 그럴까.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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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원장
"영세 반도체사업장 대책 마련 서둘러야"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원장

벤젠 등 발암물질이 삼성반도체 사업장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미 수차례 제기돼 왔다. 그 가능성을 정부가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것뿐이다. 산재 불승인의 근거자료를 만들었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기존 결과와 반대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만큼 산재 판결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정부가 안전보건 문제에 대해 형식적으로 관리해 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볼 수 있다. 노출량이 미미해 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정부의 입장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의 반대증거가 아니다.

삼성 등 대기업 등은 위험한 작업을 하청업체에 떠넘기고 있다. 특히 노출기준의 6배 이상이 발견된 비소의 경우 주로 하청업체가 하는 업무다. 영세한 반도체 사업장에 대한 실태조사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근본적으로는 대기업 등의 원청이 위험한 작업을 하청업체에게 떠넘기는 것을 막도록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 이종란

노무사(반올림)
"복지공단 항소 취소하고 실태조사 나서야"
이종란 노무사(반올림)

5년간의 투쟁 끝에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져 다행이다. 가장 최신식으로 자동화된 작업장에서조차 부산물로 발암물질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과거 열악한 환경에서는 더 많은 발암물질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게다가 이번 조사는 반도체산업에서 사용되는 수백 가지 화학물질 중 극히 일부만을 조사한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화학물질이 고온의 에너지와 만나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조사하지 않는 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이를 계기로 반도체산업 사업장에 대한 대대적인 실태조사가 시급히 진행돼야 한다. 노조가 없는 영세한 반도체 사업장 노동자들도 보호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이 하루빨리 마련돼야 한다.

이번 사건은 삼성이 산재 가능성을 일체 부인하고 은폐하려고 하면서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삼성뿐 아니라 다른 사업주들도 산재가 발생하면 산재 가능성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노동부는 약속대로 보고서 원본을 공개하고, 당사자와 삼성 등이 참여하는 공개토론회를 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과거 연구원의 잘못된 역학조사로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불승인을 내린 만큼 공단은 지금 당장 항소를 포기해야 한다.
 


▲ 문기섭

고용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관
"반도체산업 보건관리대책 강화하겠다"
문기섭 고용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관

이번 조사는 반도체산업에서 백혈병 위험도를 알아보기 위해 2008년 집단 역학조사의 후속조치로 실시됐다.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0년간 추적조사를 실시하는 것과 별도로 지난해까지 3년간 반도체 사업장의 정밀 작업환경평가를 실시한 것이다.

조사 결과 기존에 백혈병 발병 등 문제가 됐던 가공라인에서는 유해물질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조립라인에서 사용물질이 아닌 부산물로서 벤젠 등 발암물질이 확인됐다. 백혈병과 관련이 없지만 폐암을 유발할 수 있는 비소가 노출허용 기준을 초과하는 사례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양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반도체 사업장에서 발암성물질이 작업공정 중 부산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만큼 앞으로 안전보건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 한다. 논란이 됐던 삼성전자 외 나머지 반도체 업체에서도 발암물질이 검출됐다. 정부는 반도체 산업 전반에 걸친 보건관리대책을 수립하고 점검할 예정이다.

▲ 조기홍

한국노총
산업보건국장
“백혈병 산재인정, 정부·기업이 입증하라”
조기홍 한국노총 산업보건국장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발표한 ‘반도체 제조사업장 정밀 작업환경평가 연구’에서 백혈병 유발인자인 벤젠이 부산물로 검출됐다. 그동안 노동자가 벤젠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삼성의 주장이 거짓임이 밝혀졌다. 더욱이 이번 조사는 현재의 작업환경에 대한 실태조사다. 과거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감안하면 노동자들이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 사업장에서는 무수히 많은 유해화학물질이 사용된다. 그러나 기업은 영업비밀을 내세워 정확한 정보를 숨기고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보호를 위해서는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정보를 노동자에게 정확히 제공해야 한다. 기업의 영업비밀 보호가 남용되는 현실에서 기업들은 삼성반도체처럼 유해정보를 숨긴 채 문제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것이다.

산재입증 책임은 노동자가 아닌 기업이나 정부가 져야 한다. 산재발생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지 못하는 이상 노동자의 산재를 인정해야 한다. 직업병을 유발하는 원인물질이 발견된 만큼 정부는 망설임 없이 삼성반도체 노동자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

▲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국장
“직업병 가능성 폭넓게 검토하자”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국장

발암물질 노출을 인정한 노동부의 적극적인 조치는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발암물질이 발생했으나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은 아니다”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입장은 직업병 전문기관으로서 자격을 의심케 한다.

직업성 암은 노출량과 발병을 단순 대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별 노동자의 노동강도와 신체적 조건에 따라 적은 노출량에도 직업성 암이 발병한 사례가 너무도 많다. “유전적 요인 등 업무와 전혀 연관이 없다는 확증이 없는 한 직업병 가능성을 폭넓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은 직업병 전문가들의 가장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태도다.

노동부의 발표와 대책에는 우선적이고 중요한 조치들이 빠져 있다. 먼저 근로복지공단은 삼성 직업병에 대한 항소를 즉각 취하해야 한다. 노동부는 발암물질이 있다고 발표하고, 산하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은 ‘발암물질이 없다는 역학조사 결과’에 근거한 산재 항소를 계속 진행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직업병 역학조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와 대책 수립도 시급하다. 직업성 암을 비롯한 직업병의 경우 역학조사 결과는 곧바로 산재인정 여부로 이어진다. 결국 정밀하지 못한 역학조사로 인해 산재를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이나 하이닉스 같은 글로벌 기업의 작업현장이 이 정도라면, 협력업체나 중소 전자업체의 사업장은 더욱 심각할 것이다. 중소·영세 반도체전자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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