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
연구소 연구실장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유와 권력에 관한 것이다. 모든 시민은 자신의 몸과 정신을 소유할 자유를 가지고, 이 시민들이 권력기관의 책임자들을 선출한다. 노예제나 신분제 사회와 다른 점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라 말한다.

하지만 한국 노동자들의 구체적 삶을 통해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노동자가 살아가는 구체적 현장에서 시민의 자유, 권력에 대한 선출권을 기준으로 민주주의를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는 80%의 신분제 사회와 20% 민주주의 사회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기도 모 지역의 한 여성 노동자의 일주일을 한번 살펴보자.

전자부품 사업장 여성노동자 A씨는 오전 9시부터 근무를 한다. 하지만 당일 작업을 지시받기 위해 8시30분까지 출근해야 한다. 노조가 없으며, 제대로 된 근로감독 한번 받아 본 적 없는 이 사업장에서 이 30분이 근무시간이라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3시간 작업 이후 점심시간이다. 점심시간은 50분이라지만 실제 점심시간은 30분 남짓이다. 12시50분부터가 아니라 40분부터 작업이 시작되고, 작업장 안으로 12시30분까지는 들어와야 한다. 오후 5시50분까지 다시 작업을 하고 20분간 저녁식사다. 오늘은 잔업이 5시간 잡혀 있어(이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고 생산량을 맞출 때까지 일을 한다) 저녁을 먹어야 한다. 물론 이건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을 하지 못하도록 돼 있는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하지만 오늘까지 물량을 맞춰야 한다는 관리자들의 독촉에 잔업을 못하겠다거나, 근기법 위반이라고 따지는 것은 공장 안에서는 비상식적 행동이다.

A씨는 당일 오전 8시30분부터 밤 11시까지 14시간30분을 공장 안에서 보냈다. 이 시간 동안 A씨는 오직 관리자의 작업지시와 시간통제 속에서만 생활한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다. 여기에 출근시간 30분, 퇴근시간 30분은 직장으로 이동하는 시간으로 사실상 회사에 종속된 시간이다. 직급으로 나뉘어진 신분제 사회인 공장에서 그녀를 소유하는 시간은 하루의 65%이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가사 일을 보고 난 후 잠자리에 든다. 인간이 다음날 일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재생산 시간이다. 오늘 하루 그녀가 신분제 사회로 다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을 돌봐야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자유로운 시민으로 온전히 정신과 육체를 소유한 시간은 한 시간도 되지 않는다.

여성노동자 A씨는 쏟아지는 물량으로 이번주에 잔업 27시간, 특근 8시간, 특근잔업 2시간 해서 총 77시간을 일했다. 여기에 휴게시간으로 취급되지만 사실상 근로시간이었던 시간을 합하면 83시간에 달한다. 출퇴근 시간까지 합하면 89시간이다. 여기에 매일 필요한 재생산 시간(수면시간 6시간30분, 아침식사 및 출근준비시간 1시간)을 합하면 주 134시간이 신분제 사회를 위해 사용됐다. 한 주 168시간의 80%다. 일요일 24시간과 기타 시간 10시간이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 활동하기 위한 시간인데, 이마저도 한 주 이렇게 잔업 특근을 뛰고 나면 방에서 골골대기 일쑤다. 그녀는 한국에서 20% 미만의 시민이다.

노예제·신분제 사회와 구별되는 민주주의 사회는 정신과 육체를 온전히 소유한 시민들이 살아가는 사회이자 권력을 시민들이 선출하는 사회다. 그러나 사장·관리자를 대주주가 임명하고, 하위 직급자가 상위 직급자의 지시에 복종해야 하는 기업은 신분제 사회다.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이 두 사회가 병존하는 체제다. 기계적으로 한 사회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체제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노동시간이 가장 긴 한국은 OECD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뒤처진 사회 중 하나다. 아무리 투표제도가 민주적으로 만들어진다 해도, 아무리 진보적인 정권이 집권한다 해도 국민들이 신분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더 길어서는 민주주의 사회라 이야기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을 통한 기업통제를 이야기하는 급진적 사회주의는 이런 점에서 보면 ‘원칙적 민주주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13년 새해부터 노동시간 단축 이야기가 뜨겁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 나누기, 일과 여가의 조화 같은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의 조정이 아니다. 한국사회 체제에 관련된 문제고, 민주주의의 문제다. 더 나아가서는 공장 안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문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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