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 논쟁에 대해 산보연에서 더 이상 반론기고가 어렵다는 회신을 기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런데 강성규 전 연구원 원장이 지난달 산보연이 발행하는 월간지 안전보건연구동향을 통해 ‘역학조사와 산재보상’이라는 사실상 반론 성격의 글을 썼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김은아 산보연 직업병연구센터 소장뿐 아니라 강 전 원장의 과도한 믿음은 직업병 판단이 ‘과학적 판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법률에 대한 오해나 직업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직업병인지 아닌지 여부는 단순한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는 기초가 될 뿐 전부는 아니다. 법률의 해석은 법원의 판단권한이지 과학자의 권한이 아니다. 산재보험법상 업무상재해에 대한 판단은 상당인과관계에 대한 법률적 해석이다. 따라서 산보연의 역학조사 기능은 최소한의 수준에서 조력하는 것이어야 한다. 강 전 원장의 말대로 현재처럼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강 전 원장은 산재보상 제도의 틀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산재심사위원회·재심사위원회 등으로 구성되면서 “사회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했다. 즉 역학조사를 하고 송부하면 이들 기관에서 보험 취지를 감안해 판단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이는 질판위의 구조와 판정시스템을 간과한 얘기다. 질판위 부의안을 보면 사건에 대해 2~3페이지 요약문만 건네진다. 필자가 참석하고 있는 산재심사위원회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낸 서면과 증거조차 볼 수 없는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 수십 페이지 역학조사 보고서를 언제 보는지, 아니면 회의 한 건이 5분 만에 이뤄지는데 어떻게 신중히 심리하고 판단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참고로 질판위 판정서를 보면 역학조사 회신 내용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

강 전 원장은 “역학조사와 산재승인결과가 일치할 필요가 없고, 산재보험에서 보상해 주기로 하면 되는 것이며, 우리는 이미 이렇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역학조사가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일 뿐이다. 현재와 같이 직업성 암의 역학조사 의뢰기준이 모호하고, 그 내용과 절차에 대해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사실상 ‘결정적 영향을 행사’한 후 과정과 절차에 대해 눈감겠다는 것은 그 기관의 존재의의를 의심하게 한다. 실제 심사와 재심사, 행정소송을 가더라도 역학조사 내용은 업무기인성 부정의 가장 중요한 ‘반대 증거’가 된다. 현재와 같이 입증책임이 노동자에게 있는 이상 산보연의 역학조사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든다. 법원에서도 별도의 반대견해의 의학적 감정이 있지 않는 한, 산보연 역학조사 회신서의 증거능력을 부인하지 않는다. 역학조사 보고서가 ‘증거’가 되고 ‘권력’이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한 사람과 한 가족의 사회적 생명이 달린 문제가 결정되고 있다.

지금도 역학조사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타당성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현장을 단 한 번도 조사하지 않은 채 역학조사 회신서를 쓴 사례도 있다. 이전 칼럼에서 예로 든 비계공 폐암 소송을 보면, 소송에서 밝혀진 것은 산보연 역학조사 내용의 과학성이 떨어지며, 국제적 인정기준과 각종 논문에 나와 있는 내용과 불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작업을 했던(오히려 업무력이 10년 이상 긴 사례) 노동자의 산재신청 사건에서 산보연은 이 전 사건 역학조사 보고서를 그대로 복사해(그것도 비교표를 만들어) "업무관련성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김은아 소장의 글 속에서도 과학주의의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가장 과학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인 판단이라는 것의 개념에 대해서도 의아할 뿐이다. 과학을 포함한 모든 지식은 현재 수준에서 측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불안전한 지식과 연구 성과의 한계선상에서 말이다. 역학조사와 사회과학 모두 개인의 주관적 개입을 배제한 순수한 개념의 '객관성'이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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