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사회과학정책
대학원 교수

그를 가리켜 누군가는 박정희 시대의 최대 수혜자 가운데 하나요, 노동자를 탄압한 기업인이자, 개발독재시대의 자본가라고 한다. 그의 인간관계나 살아온 시대 그리고 서 있던 위치만을 보면 그럴 만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없는 그를 생각하기는 어렵고, 개발독재의 지휘체계 없이 그의 업적이 가능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일부에서 규정된 그가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장기집권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세계 최대의 사원 복지시스템을 가진 기업을 만들었다. 직원 자녀들을 위한 교육환경과 그에 더하여 세계적인 공과대학을 설립했다. 국민 공기업이 민영화되면서 자신은 주식 하나 소유하지 않았고 스톡옵션 받기를 거부했다. 한겨레신문 창립 때 모인 기금의 3분의 1인 5억원을 만들어 냈고, 자기가 살고 있던 집을 판 14억원 가운데 10억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으며 나머지는 자신의 사후 부인이 살 수 있는 돈으로 남겨 뒀다.

이런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면 좋을까. 이 뿐인가. 그가 만든 기업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제철공장으로 우뚝 섰다. 당시에는 누구도 가능하리라 여기지 못했던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직원과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다뤘던 것을 그는 세월이 흘러 공개적으로 사죄했다. 아무리 목표가 분명하고 절박했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상처를 주고 인간적으로 모욕을 준 것은 옳지 못했다는 반성이었다. 박정희 시대가 경제의 발전을 이룬 이면에는 민주주의를 좌절시킨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또렷하게 말한다.

“빈곤의 사슬도 기억하게 해야 하지만 독재의 사슬도 기억하게 해야 한다”는 말은 그가 한 유명한 말이다. 박정희의 충직한 부하라는 그 운명적 만남을 생각하면 하기 어려운 말이다. 이 땅의 그 어떤 보수도 이런 식의 역사적 성찰과 반성을 한 적이 없다. 그는 박정희를 존경하지만 박정희를 기리는 모임이나 정치적 회합 그 어디에도 끼지 않는다. 박정희에 대한 날선 비판에 대해 틀린 이야기가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이른바 ‘수구꼴통’과는 전혀 다른 보수다.

그는 또한 자본가가 아니었다. 그가 만든 포항제철은 국민기업이었고, 창업자인 그는 그걸 통해 이윤을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국가건설의 기초 역량을 다지려 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으니 주식이나 스톡옵션 보유를 거부한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스톡옵션 체제를 만들고자 한 포항제철의 후대세력에게 계속 쓴소리를 했던 것 역시 당연했다. 그의 머리에는 이 기업은 민족의 피를 대가로 세운 것이라는 사실이 철저하게 각인돼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평생,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다.

이에 더하여 그는 진보진영의 인물들을 음으로 양으로 아끼고 지원했다. 그런 삶이 훗날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신뢰로 DJT를 이뤄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했고,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선생의 깊은 존경을 받는 사유가 됐다. 집도 없이 큰딸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걸 아는 이는 적고, 외환위기 당시 IMF 관리체제 아래 일본으로부터 부랴부랴 돈을 차입해서 재정적자를 메우는 일에 동분서주했던 것도 국민은 모른다.

‘박정희하고 친하지 않았느냐?’, ‘세계 굴지의 기업의 왕초였으니 당연히 노동자들을 짓밟았겠지’, ‘얼마나 해먹고 부자가 돼 떵떵거리며 살았겠어?’, ‘다 숨겨 놓은 재산이 있지 없겠어?’ 이런 식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바가 아니다. 그런 위치에 있던 자들이 대체로 그렇게 살아왔으니 그 역시 그런 자들 가운데 하나라고 여길 수 있다.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난도질을 해 댄다.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조차, 아침에는 이명박과 싸우며 밤에는 개발독재의 자본가와 양주를 퍼마신다는 둥, ‘개드립’이라는 둥, 인격 모독과 헐뜯기를 서슴지 않는다. 진보라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한 인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매우 정밀해야 한다. 모르는 면모가 드러나면 그걸 기초로 재평가해야 한다. 그게 진보다.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인정할 만한 사실이 있으면 받아들이는 것이 진보다. 도식적 평가는 진보를 죽인다. 통합진보당의 결성 과정에서 일부 진보세력이 유시민 전 국민참여당 대표와 그 세력에게 가했던 비난을 돌이켜 보라.

필자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죽음 앞에서 추도문을 써 올리자 일부 진보진영의 이런저런 이들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박태준 회장이 용서할 수 없는 역사의 범죄자인가. 내가 노동계급을 배반하고 권력을 누리려고 했던가.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런 식의 시선과 평가는 인간에 대한 기본성찰을 스스로 폐기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조선시대 노론이 주도했던 시기, 사화는 바로 이러한 교조적-도식적 평가의 산물이었다. 진보의 편협성과 도식주의는 역사의 공과 평가에서 진보의 마녀사냥을 가져올 뿐이다.

박태준 회장은 이 땅에 보기 드문 보수적 인물의 모델이다. 그것은 귀한 자산이다. 저열한 진보가 있듯이, 공적책무를 다하려는 보수가 있게 마련이다. 어느 인간이 완벽하겠는가. 그러나 평가할 만한 것이 있다면, 평가해야 한다. 그가 어느 입장과 노선에 있던, 그럴 만한 자세를 갖춘 것이 진보의 힘이다.

예수가 제사장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했을 때, 로마군단의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줬을 때, 도식주의자들은 예수를 비난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다. 그런 일들이 예수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과 백부장을 예수의 편에 서게 했다는 사실을. 참된 보수의 모범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진보는 거의 언제나 자기진영 내부를 향해 화살을 쏘아 대며 서로 피를 흘리게 한다.

이 절망적인 도식주의를 깨지 못하면, 진보는 조금이라도 차이가 보이면 안에서 무식하게 분열하고 잔인하게 공격하는 습관을 지속하고 말 것이다.

성공회대 사회과학정책대학원 교수 (globalize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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