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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타이밍이랄까. 진보대통합이 실패로 마무리되고 자유-진보연합이 공공연하게 운위되던 시기에 <파벌-민주노동당 정파갈등의 기원과 종말>(정영태·2011·이매진, 사진)이 출간됐다. 역시 진보대통합은 파벌들 때문에 성사될 수 없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민주노동당과 과거 진보신당의 통합파, 그리고 국민참여당이 새로이 통합정당을 만들기로 합의한 것, 이른바 ‘자유-진보통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파벌>은 의미 있는 저작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 대상과 관련해 보수정당의 파벌을 다룬 연구는 있어도 진보정당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연구 자체가 빈곤하기 때문이다. 둘째,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파벌 연구를 위한 이론적 틀의 구성을 모색해 향후 좀 더 세련된 분석틀을 고안하기 위한 기초를 닦아 놓았다는 점 때문이다. 셋째, 구술사 방법을 동원해 개별 주체들의 행위를 유발시킨 내밀한 미시적 요인들을 드러내 그 공식결정의 이면을 채우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파벌>은 민주노동당 안의 갈등과 분당의 원인을 드러내기 위해 당 내외의 복합적 관계들의 응축이었던 과거의 ‘사건들’을 불러와 재차 복기하고 있다. 그 결과 이른바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의 갈등을 초래하고 그것을 증폭시킨 원인을 노선상의 차이, 조직문화의 차이, 당권을 둘러싼 경쟁, 그리고 갈등의 발생시 그것을 다룰 권위 있고 중립적인 조정자나 중재자의 부재 등으로 압축하고, 분당이라는 비극이 또 한 번의 희극으로 재현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과는 달리 과거 분당의 비극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중심이 된 진보대통합이 실패하면서 또 한 번의 희극으로 재현된 바 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파벌>은 자주파가 민주노동당에 조직적으로 합류한 이유를 김대중 정부의 친미신자유주의정책으로 ‘비판적 지지’의 명분이 줄어들었고 민주노동당의 대중기반이 취약하다는 명분도 민주노총의 참여로 설득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평등파는 왜 그들을 받아들였을까. <파벌>에 의하면 원내진출에 필요한 세를 구축하기 위해 자주파가 장악하고 있는 대중조직을 흡수할 필요가 있었고 그들이 ‘비판적 지지’노선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조선노동당에 대한 그들의 종속성 또한 민주노동당으로 합류하면 바뀌거나 그들이 소수파이기에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과거 진보신당으로의 분당, 그리고 2012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진행된 진보대통합 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애초 평등파들이 자주파들과 함께하도록 마음먹게 했던 ‘주관적 믿음’이 실제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후 자주파는 ‘민주대연합과 비판적 지지’ 노선을 버리지 않았고 조선노동당에 대한 종속성 또한 변하지 않았으며, 그런 그들을 평등파가 제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광일

성균관대 강사

이런 측면에서 <파벌>이 지니는 가치는 더 크다. 그것은 분당과 진보대통합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원인, 나아가 지금의 민주노동당이 ‘진보적 민주주의’로 강령을 수정하며 ‘자유-진보통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원인을 필연적인 것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기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진정 진보좌파정치의 재구성은 요원한 것인가. <파벌>의 행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는 것이다. 이제 보낼 것은 단호히 보내고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야 할 때인 것이다. <파벌>이 주는 가장 커다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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