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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이 노동자의 버팀목 되려면

엄진령

공인노무사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외주 출판 노동자들은 계약서가 없다.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것이 관행화된 출판 산업의 현실 속에서 수많은 외주 노동자들은 구두계약만으로 일한다. 그러니 임금이 체불되고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다. 끈질기게 괴롭히면 받아낼 수 있지만 소송을 하거나 강하게 권리를 주장하면 다시 일을 받기가 힘들다. 노동법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노동자에게 교부하도록 돼 있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공단지역을 떠돌아다니는 파견 노동자들은 4대 사회보험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 가입을 안 시켜 주는 것은 기본이고, 굳이 가입해 달라고 하는 노동자들도 보기 힘들다. 워낙에 저임금이기 때문에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공장에서 4대 사회보험을 들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고자 하는 까닭이다. 휴식시간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8시간 일하면 한 시간을 휴게시간으로 줘야 하지만, 회사는 간간이 주어지는 10분도 채 안 되는 휴식시간을 휴게시간에 다 포함시켜 실제로는 밥 먹고 나면 제대로 쉴 시간도 없게 된다.

또 투쟁을 할 때마다 용역깡패에게 폭행을 당하고 현장에서 밀려나는 노동자들이 있고, 민주노조를 만들었다고 날마다 구사대의 폭력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있다. 노조활동이 법으로 보장되고, 게다가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법에서 정하고 있다고 다 지켜지는 것이 아닐뿐더러 이렇게 현실은 법을 넘어서서 노동자들을 구속하고 폭행하고 권리를 억누른다.

한편 그것은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다. 최근 희망버스 탑승객이라는 이유로 연행된 한 동지의 체포영장에서 기가 막힌 대목을 발견했다. 희망버스가 “정리해고 박살, 비정규직 폐지 등을 실현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바, 현행법상 인정될 수 없는 수단과 목적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쳐 온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가 현행법상 인정 될 수 없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노동자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도 사용자의 권한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것, 이 한 구절은 현실의 법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법의 실체를 이미 잘 알고 있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노동자가 아니라고 하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투쟁을 불법으로 규정짓는 현실, 교섭창구단일화를 이유로 노동자들의 교섭권을 부정하고 필수유지업무라는 이유로 파업권을 박탈해 가는 현실, 정리해고라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사용자의 해고권한을 무제한적으로 인정해 주고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쉽게 쓰이고 쉽게 잘려나가는 현실, 그 모든 폭력은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래도 법이 희망이 될 수 있을까. 10년 전 노무사 수습을 하고 있을 때 선배 노무사 한 명은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들을 보며 ‘투쟁이 잘 마무리되면 한꺼번에 치워질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투쟁이 마무리돼도 서류들은 책상위에서 치워지지 않는다. 투쟁은 미미하고 재판 결과만 기다리고 있는 경우들도 본다. 지난 10년간 노동자들의 삶은 더 힘들어졌고, 힘든 삶을 헤쳐가야 할 투쟁의 힘은 더 떨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법률 투쟁’이라는 말이 많이 들린다. 하지만 말이 좋아 ‘법률 투쟁’이지, 소송은 현장의 투쟁과 함께 갈 때 투쟁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노동자들의 힘이 있어야 법도 현실이 될 수 있고, 나쁜 법도 바꿀 수 있다. 물론 이는 법률가들보다 현장의 활동가들이 더 뼈저리게 느끼는 것일 테다.

그러니 함께 길을 찾아보자. 악법이건, 좋은 법이건 노동법 조문 하나하나에는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가 담겨 있다. 때로는 처절한 패배가 있고, 때로는 노동자의 힘찬 승리의 기억도 있다. 그것은 모두 현행법이 허용하지 않는, 그 이상을 꿈꾸는 이들이 쓴 역사다. 노동자를 구속하고 폭행하고 권리를 억누르는 법이 아닌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내일의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법을 만드는 길을 함께 찾아보자. 법이 희망인 것이 아니다. 투쟁이 희망을 만들고, 그 희망이 실현될 때 법은 다시 노동자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엄진령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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