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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노동자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업체 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매일 수없이 많은 금융상품이 시장에 쏟아진다. 상품이 개발될 때마다 목표량이 할당된다. 금융노동자는 영업 목표량 달성을 위해 자신의 지갑을 털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 있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폭탄’을 껴안고 사는 금융노동자의 고단한 하루를 들여다 봤다. 편집자주

KB국민은행에서 20년 넘게 근무하고 있는 백상욱(가명·43) 차장은 자신이 근무하는 은행의 발행 통장만 20여개를 갖고 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잔액은 15만원 안팎이고 대부분 3개월이 지나면 해지된다. 며칠이 지나면 또 다시 같은 금액이 찍힌 새로운 통장을 개설한다. 일명 ‘자폭통장’이다.

은행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할 때마다 영업목표량이 할당되지만 상당수 직원들은 회사의 요구만큼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이들은 타인 명의로 계좌를 개설해 자신의 돈을 쏟아붓는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윗사람의 눈치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일 못하는 직원’으로 낙인찍힌다.

백 차장은 “2002년 딸아이 명의로 처음 시작한 이후 해지와 가입을 수백 차례 해왔다”며 “의미도 없고 주위를 번거롭게 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백 차장은 은행이 원금 손실의 위험이 있는 방카슈랑스나 펀드 개설을 강요하지 않아 다행이라 여긴다.



딸 이름으로 통장 개설, 가입·해지 수차례 반복



실적 압박은 은행 노동자들의 주말까지 앗아 가고 있다. 우리은행에서 21년째 근무하는 김아무개(41)차장은 올해 여름부터 주말마다 신용카드 신규 가입자를 찾아 시내를 헤맨다. 그가 얼마 전부터 이일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올해 들어 영업본부별로 신규 가입자 유치 순위를 매기기 때문이다. 그는 한때 방심했다가 바닥까지 순위가 밀린 이후에는 주말까지 할애해 신규 가입자를 찾아다닌다.

그 뒤 석 달째 그의 출근 요일은 ‘월화수목금금금’이 됐다. 회사의 지원이 일체 없어 밥값·차비·가입자를 위한 선물까지에 챙기고 나면 10만원은 우습게 날아간다.

김씨는 “남들 놀 때 뭐하는 거냐 싶지만 순위가 뒤처지면 무능력자로 보는 분위기 때문에 주말에도 쉴 수가 없다”며 “새 상품이 나올 때마다 영업목표가 주어지고 순위 매기기가 시작되면 동료들이 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고 토로했다.



보험노동자 “원금이라도 보전되면 다행”



금융권 노동자들의 제 살 깎기는 보험업계에 이르면 더욱 심각해진다. 자폭통장이야 최소한 원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보험업계에서는 할당된 목표량을 맞추기 위해 쏟아부은 돈이 휴지 조각으로 변한기 일쑤다.

한 손해보험사 울산지역 지점장인 손범기(가명·39)씨는 매달 월급 통장을 확인할 때마다 한숨이 푹푹 나온다. 수십만원의 돈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울산지역 지점은 손씨에게 달마다 1천500만원의 신규 목표치를 부여한다. 신규 가입자의 월불입 총액을 합쳤을 때 이정도 금액을 맞추라는 것이다.

두 달 전 손씨는 설계사들을 달달 볶았지만 마감을 눈앞에 두고 목표치에서 200만원이 부족했다. 그는 결국 몇몇 지인의 명의로 계약서를 만든 후에야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물론 보험료는 자신의 월급 통장에서 빠져 나가도록 했다.

이처럼 실적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돈으로 계약한 것을 업계에서는 ‘자기작성’이라고 부른다. 손씨는 보험료가 빠져 나가자마자 곧바로 계약을 해지했고 30만원가량의 환급금만 받았다. 부랴부랴 목표치는 채웠지만 한 순간에 170만원을 날린 셈이다.

손 지점장은 “매달 70만원 이상을 자기작성으로 때운다”며 “다른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증권업계 “약정이 사람보다 중요해”



증권업계에선 ‘약정이 곧 인격’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통용되고 있다. 그만큼 실적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약정’의 사전적 의미는 증권시장에서 매매가 성립되는 상황을 뜻한다. 하지만 보통 증권노동자들 사이에선 한 달간 거둬들인 판매 수수료의 총합으로 받아들여진다. 대다수의 증권사는 직급별로 약정액을 정해 놓는다. 평균적으로 대리 1천100만원·과장 1천300만원·차장 1천400만원·부장 1천500만원 수준이다. 현대증권 구리지점에서 일하는 한병호(가명·39세) 차장은 매달 주어지는 약정(1천400만원) 대부분을 채우는 편이다. 하지만 “피땀 어린 노력이 뒤따르는 일”이라고 얘기한다.

회사 내부적으로 1억원의 거래를 성사시킬 경우 50만원을 약정액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한 차장은 매달 28억원의 거래를 따내야 한다. 한 차장은 이 액수를 채우기 위해서 거의 매일 퇴근 이후 고객들과 술자리를 갖는다. 회사는 비용을 지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거래량이 부족할 경우가 태반이다. 그럴 땐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 돈으로 주식을 샀다가 되판다.

매도·매수 수수료와 세금을 합하면 그때마다 매매대금에서 1.3%가 빠져 나간다. 거래규모가 보통 억 단위이기 때문에 나름 고액연봉자인 한 차장에게도 부담이 되는 액수다. 한 차장은 “인터넷 매매가 활성화 되면서 현장거래가 줄어 우리 약정액에 포함되는 비중도 줄어들고 있다”며 “그만큼 영업부담도 가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넣었다 빼는 ‘거품 실적’



이처럼 금융업종 전반에 걸쳐서 제 살 깎기 식 영업행위가 퍼진 것은, 경영진의 단기 실적주의 때문이다.

노동자의 돈으로 상품에 가입하고 곧바로 해약하는 의미없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는데, 단기 실적에 치중하지 않고서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노동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 쌓아 올린 실적은 ‘거품’으로 끝나는 셈이다.

하나은행에서 20년을 일했다는 문아무개(40) 과장은 “은행의 영업목표 할당은 정상적으로 상품을 권유해 판매하기보다는 단순히 실적만 채우라는 것”이라며 “자금이 일시적으로 들어갔다 빠지는데 은행 입장에서 도대체 무슨 이익이 나겠냐”고 반문했다.

우리은행의 한 직원은 “경영진이 단기실적을 과대포장해 승진의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노동계는 업체 간 과당경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영업목표 설정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사용자측은 영업목표가 과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목표를 조정하는 것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재계·정부, 과당경쟁 ‘나 몰라라’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가 지난달 조합원 5천58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영업점 직원 5명중 4명이 자폭통장을 보유하고 있다고 답했다. 무려 97%의 영업사원은 “고객 증대 캠페인에 부담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KB국민은행 관계자는 “직원 중 일부가 본인이나 지인 명의로 통장을 개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영업 할당량에 과도한 부분이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 알 것”이라고 말했다.

보험업계도 마찬가지다. 전국손해보험협회 관계자는 “자기작성 계약은 모집 질서를 해치는 행위로 보고 수시로 점검하고 있다”면서도 “은행·카드 등 금융업종 모두가 실적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실적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협회 차원에서 논의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금융 당국도 기업의 과잉 실적 요구를 제재할 근거가 없다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실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행동이 있었다면 단속하지만 어느 정도의 실적 요구가 적당한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고 말했다.

조혜경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단기 실적을 올리기 위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운영이 금융노동자들의 정신·물질적인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경영진이 새로운 수익 창출 방식을 내놓지 않는 이상 현재의 관행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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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묻지마 매출행위에 ‘고객 피해’ 가능성도

“수익성·안전성 무시한 채 단기실적에 매몰”



금융권의 과도한 단기실적 추구와 지나친 영업경쟁으로 노동자들만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니다. 고객들에게 피해가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

고객 입장에서는 안전하면서도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통장·보험 등의 상품에 가입해야 하는데, 당장 영업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묻지마식 상품 매출’로 손해를 볼 개연성이 커지는 것이다.

실제 영업 일선의 금융노동자들은 고객 피해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KB국민은행의 19년차 직원인 최아무개(39)씨는 “고객이 왔을 때 금리도 더 높고 좋은 상품이 있는데도 당장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상품을 권할 때도 있다”며 “내 실적을 위해서 고객에서 손해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에 미안하기도 하다”고 전했다.

증권사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주식거래를 성사시켜 수수료 수익이 오르면 좋지만, 주식시장 상황에 따라 고객의 위험부담이 커질 수도 있다. 현대증권의 한 직원은 “목표 달성도 부담이지만 총액이 커질수록 고객 손익 관리에 따른 스트레스도 그만큼 커진다”고 말했다.

금융권 노동계는 회사의 과도한 영업행위가 노조원들에게 미칠 피해 방지대책은 물론이고 고객피해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도 부심하고 있다.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는 회사와 노조원들을 상대로 ‘건전한 영업활동’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영업실적에 급급해 고객에게 부적합한 상품을 판매하는 일은 지양하자는 것이다.

증권노조들은 회사가 새 상품을 할당할 때에 ‘사전 검열’을 한다. 민경윤 민주금융노조 위원장은 “회사의 캠페인 요구를 수용하기 전에 원금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지, 안전성이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며 “조합원들과 고객의 피해를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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