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범야권 단일후보가 승리했다. 다행이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노동 탄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정부가, 이명박 정권 평가가 핵심인 이번 선거에서 승리했다면 더욱 기세등등하게 활개를 쳤을 것이다. 적극적 지지자였든, 울며 겨자 먹기로 지지했든 선거에서 패배했다면 진보진영 전체의 침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박원순 후보가 노동자들의 진정한 대변자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재벌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주주들의 이해를 앞세운 소액주주운동, 재벌과 금융자본의 몇 푼 기부금에 사회적 책임이라는 면죄부를 준 아름다운재단은 지금도 삼성의 반노조 탄압에, 현대차의 하청 노사관계 개입에, 한진중공업의 막무가내 식 정리해고에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현실과 배치된다. 하지만 제도정치는 최악을 제외하고 차선과 차악 정도의 폭에서 선택을 하는 문제이기에, 선거 공간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박원순씨의 서울시장 당선은 축하할 일이다.

이제 문제는 노동운동이다. 87년 6월 항쟁이 형식적 민주주의 쟁취에 그쳤을 때 노동자들은 스스로 일어서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변화의 물결이 공장 담벼락에서 멈췄을 때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운동으로 다시 변화를 만들어 냈다.

10·26 서울시장 선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원순 선거운동본부에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이 함께했지만 사실 박원순씨의 서울시가 노동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박원순 선본은 서울시 산하기관들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민간위탁을 제한하며,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할 것을 약속했다. 모두 서울시 재정지출 확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세훈 재임 기간 세 배 가까이 늘어난 서울시 부채로 인해 서울시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은 매우 적다. 더군다나 지난 10년간 신자유주의 노동시장 정책을 만들어 왔던 민주당의 서울시의회가 그리 표시도 나지 않는 노동문제를 상위 의제로 받아들일 리도 없다.

박원순씨 스스로도 노동의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10·26 서울시 보궐선거에서 만들어진 변화의 파도가 지금도 위험한 거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환경미화 노동자들, 100만원 내외의 저임금을 받고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을 하는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에게 닿기까지는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여러 현실 정치적 제약으로 닿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다.

결국 노동자들 스스로가 쟁취해야 한다. 10·26 선거 승리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둘러싼 수많은 조건 중 하나를 조금 좋게 만들었을 뿐이다. 6월 항쟁에 이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물론 당시와 조건이 같을 수는 없다. 민주노조운동은 십수년간 반복적으로 투쟁에서 패해 왔고,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적 기대도 예전 같지 않다. 정권의 탄압은 더욱 교묘해졌고, 현재 노동자들의 사기는 매우 낮다. 그러함에도 10·26 선거에서 보여 준 시민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노동현장의 변화로까지 이어 가기 위해서는 노조로 단결해 스스로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

진보정당들 역시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현실의 정치적 장벽으로 야권연대가 불가피했다 하더라도 선거가 끝난 상황에서 다시 민주당과 연대에 질질 끌려 다녀서는 결국 만년 소수 정당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서울시에 조그만 자리 하나를 받아 낸들, 내년 총선에서 적당한 선거구를 받아 낸들 진보정당이 질적으로 발전할 수는 없다. 오히려 어쩔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는 민주당과 서울시장에 대한 비판 여론에 함께 휩쓸려 갈 가능성이 크다.

한때 급진정당으로 성장했다 쇠락한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PRC)은 좋은 예다. 93년에 건설돼 반전운동·대안세계화운동·노동자투쟁 지원 등으로 크게 성장한 공산주의재건당은 2006년 프로디 중도좌파 연정에 참여했지만 2007년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대중적 비판을 받게 되고, 결국 2008년 총선에서 예전의 3분의 1에 불과한 득표를 하고 쇠락했다.

범야권연대에 대한 지지를 보냈지만 결국 스스로의 투쟁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처지는 우연하게도 서울시장 선거와 같은날 잡힌 중앙노동위원회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건 심판회의에서도 드러났다. 10월26일 진보진영이 선거 승리에 들떠 있던 그 시간 한진중 해고 노동자들은 중노위 회의실을 점거해야만 했다. 중노위의 정부측과 사측 위원이 부당해고 판정이 아니라 11월2일까지 ‘화해’하고 오라는 어이없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화해란 쌍방이 죄를 저질렀을 때 하는 것이지 노동자들이 사측으로부터 단협까지 무시당하며 정리해고를 당한 상황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정리해고도, 비정규직 철폐도 결국 노동자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 진보정당이 스스로 힘을 키워 정치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제 10·26 잔치는 끝났으니 노동자답게, 민주노조답게 투쟁하는 겨울을 준비할 때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