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폭락·금값급등·살인적 물가·실업·사회보장 축소 등으로 인한 폭동과 시위…. 역사책에서 봤던 대공황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요즘 신문기사를 채우고 있다. 각국 정부들은 이미 정책수단을 다 사용해 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은 대외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여서 세계경제 위기의 영향이 더 빠르고 크게 미치고 있다. 4대강 사업·감세정책으로 재정지출 여력도 소진돼 있다. 10년 이상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극심한 양극화와 가계부채 문제는 지금의 위기를 더 심화·지속시킬 것이다. 생산과 소비의 전 세계적 연결은 갈수록 커져 왔는데, 자본의 사적 이윤추구를 위한 생산이라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근본적 한계가 또 한 차례 우리를 고통에 몰아넣고 휩쓸고 지나가려 하고 있다. 이번 위기로 노동자와 서민들이 겪는 고통은 예전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을 것이다.

노무사가 무슨 경제 이야기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필자를 비롯해 이 칼럼을 릴레이로 연재하고 있는 ‘노동자 사건만 하는 노무사’들은 이런 경제위기 와중에 어떻게 살아갈까. 솔직히 주판알부터 튕겨 보면 노동자 사건만 한다 해도, 노무사는 경제공황으로 기업들이 무너질 때 할 일이 많아지고 돈도 더 벌수 있다.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는 어색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자. 저하된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자본이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해고사건도 많고 집단적으로 저항하는 노동자와 노조가 일거리를 많이 가져다준다. 자본의 노동탄압이 거세지기 때문에 덩어리 큰 사건들이 많아지니 한동안 사건에 파묻혀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아니 최근 노동운동은 조합주의와 실리주의 경향 때문에 투쟁하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 어쩌면 큰 사건은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건처리로 수익이 좀 늘어 웃음 지으면서도 법적으로는 노동자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한탄을 하게 될 것이다. 구조조정이 진행돼 기업이 도산하면 임금과 퇴직금을 못 받는 노동자들이 늘어나 씁쓸하지만 체당금사건(3개월치 임금과 3년치 퇴직금을 임금채권보장기금으로 지급해 주는 제도)으로 수수료를 챙길 수 있게 된다. 노동자·민중이 엄청난 고통을 전가당한 후 자본이 구조조정을 끝냈을 때 노동현장은 노동강도가 훨씬 더 강해질 것이고 그러면 과로와 스트레스로 쓰러지거나, 근골격계 질환 등 병들고 죽고 다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 씁쓸하지만 어쨌든 산재사건으로 수임료를 챙기게 된다. 사건을 하면서는 산재보험법의 산재인정기준과 근로복지공단의 태도 등에 대해 또 한 번 한탄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은 노무사가 사건을 처리해 주니 “고통스럽고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합법성 속에서의 권리보호’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적당히 해결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현실적 고통을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문제와 결부짓는 부담스러운 생각을 접어 두게 된다. 노무사의 ‘법률지원’은 그야말로 법적 내용에 대한 현실적·실무적 대응, 화해·합의·중재 등 사건해결방법 제시에 그치기 때문에 자본의 이해에 의해 제정·운영되는 법적 그물망을 피하거나 합법적으로 그물망을 좀 느슨하게 만들 뿐인데도 말이다. 요즘처럼 노동자들의 힘이 수세적일 때는 이마저도 할 수 없을 듯하다.

이렇게 보면 ‘노동자 사건만 한다’며 도덕적으로 자위하며 별생각 없이 일하다가는 자본이 한국에 노무사 제도를 만든 취지에 본질적으로 충실하게 활동하는 꼴이 된다. 자본이 노무사 제도를 만든 이유는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체제에 의문을 가지고 반자본주의적 의식을 확립하지 못하도록 노동법과 제도의 운영에 유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노동운동판에서 필자와 같이 ‘노동자 사건만 수행하는 노무사’의 영향력이 커졌다. 정치는 진보정당이 수행하고 노동자들은 노조를 잘 지키면 된다고 하는 분업구조(이른바 '양날개론')가 고착화된 이후 노동자들은 자기의 조합적 이해에만 골몰하고 자본의 이해가 담뿍 반영된 노동법의 틀 내에서 사고하고 움직이게 됐다. 교육·주거(부동산)·여성·환경 등 사회적 문제가 노동현장 문제와 별개가 아님에도 이런 문제들을 현장의 문제로 노동자들의 정치로 만들고 자본과 정권에 맞서 투쟁하지 않게 됐다. 2008년 대규모 촛불투쟁 때도 조직된 노동자들은 이를 자신의 투쟁으로 상승시키지 않았다.

전 세계적 경제공황이 닥쳐오고 있는데도 노동자들은 조합주의와 실리주의에 빠져 역사의 주체로 설 능력과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노동자를 지원하는 노무사’, ‘노동법전문가’라는 타이틀에 자족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어차피 노동자 사건만 하며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길 위의 노무사’라면 제대로 하자고 각오를 다지게 된다. 자본이 조합주의의 틀 안에 가둔 근로조건 개선 문제 안에서만 사고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노동법과 노무사 제도의 한계를 넘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다. 노동현장의 문제뿐 아니라 경제·환경·여성·교육·소비·주거·문화 등 사회현실 전반의 문제를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치로 확장시켜 낼 수 있게 도울 수 있는 능력을 키울 것이다. 경제위기의 원인과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노동자들과 함께 인식하고 근본적 대안을 만들기 위해 현실에서 가능한 아주 작은 실천이라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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