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 후드득. 이 기사는 효과음이 필요하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장대비가 비닐천막을 때려 댔다. 아무렴 어떠랴. 귀에 들리지 않으면 눈으로 보면 그만이다. 두 평 남짓 농성장 안에 배어 있는 투쟁의 노곤함.

3일 오후 서울 합동 주한프랑스대사관 앞. 비닐천막 한 동이 생뚱맞게 서 있다. 280일째 같은 자리다. 비닐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엔 스티로폼과 가정용 비닐장판이 깔렸다. 꽤 구색을 갖췄다.

“자. 들어왔으면 목부터 축이시고~.”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는데 다짜고짜 물잔부터 권하는 사람들. 이날로 운명을 마치는 비닐천막의 철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노동자들이다.

“해단식이라고 하니까 꼭 투쟁을 접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고…. 달리 부를 이름이 없길래 해단식이라고 붙였어요. 그런데 비가 너무 와서 해단식을 미뤄야 될 것 같네요.” 이택호(40·사진) 금속노조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 지회장의 설명이다.



정리해고 노동자 여기 또 있다

공장폐쇄와 임직원 180여명 전원 해고. 2009년 10월 발레오공조코리아 천안공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날벼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정리해고 규모만 놓고 보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보다 많은 인원이 해고됐다. 해고기간도 더 길다.

정리해고된 지 1년10개월이 흘렀다. 공장은 멈춘 채 그대로이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공장복귀를 바라고 있다. 해고되기 전 조합원이 146명이었는데, 지금도 70여명의 노동자가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다. 해고자들 살림살이야 말 안 해도 뻔하다. 적금을 깨고, 보험을 깨고, 애들은 진작에 학원을 그만두고, 친인척들한테 손 한번 안 벌려 본 이 없을 것이다.

“그냥 버티는 거죠 뭐. 그 꼴 보기 싫은 와이프들이 대신 돈 벌러 가거나.”
이 지회장이 별일 아니란 투로 말한다. 투쟁을 오래하더니 달관의 경지에 올랐나 보다. 그래도 70명이 넘는 노동자가, 그 가족까지 치면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손가락만 빨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생계 투쟁’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20명이 일당 3만5천원짜리 공공근로를 나간다. 충남도의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원래 배우자가 소득이 있거나 주택 등 보유재산이 일정액을 넘을 경우 공공근로를 신청할 수 없다. 그런데 충남도가 산하 시·군에 공문을 내렸다. 폐업이나 직장폐쇄로 생계난에 처한 지역의 노동자들에게도 공공근로 신청권을 부여하라는 것이다.

“20명이 벌어 온 돈은 고스란히 지회로 반납해야 돼요. 거기서 조합비 10% 떼고, 나머지는 조합원 머릿수대로 나눠 갖기로 했어요.”
하지만 지자체의 지원은 딱 여기까지다. 발레오 같은 관내 다국적기업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이겠다던 계획이나 TF팀을 구성해 지역 내 노동 문제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겠다던 청사진은 흐지부지됐다.

정리해고가 대수롭지 않은 프랑스

초국적자본·먹튀·정리해고…. 발레오 해고 사태를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키워드다. 자동차 에어컨에 들어가는 냉매압축기를 제작하는 발레오공조코리아는 2009년 10월26일 전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다음날 퀵서비스를 이용해 직원들에게 "11월30일부로 근로관계가 해지된다"고 통보했다. 공장은 폐쇄됐다. 부동산과 기계설비, 각종 채무 등에 대한 청산절차가 시작됐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회사로부터 버려진 노동자들은 모기업인 발레오그룹이 있는 프랑스에만 다섯 번을 찾아가 한국에서 벌어진 집단해고 사태에 대한 해결을 촉구했다. 주한프랑스대사관 앞 천막농성도 그렇게 시작됐다.

“없는 돈 탈탈 털어 프랑스에 가 보니 거기 사람들은 정리해고나 희망퇴직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만큼 크지 않아요. 해고돼도 몇 년 동안 먹고살 만한 보상금이 나오고, 사회안전망이 튼튼하니까요. 정리해고에 대한 해법을 정부가 내놓아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이날의 ‘해단식’은 거행되지 못했다. 폭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막을 유지하면서 투쟁을 해야 한다”는 조합원들의 불평도 접수됐다. 이 지회장은 “조합원들 고집이 세서 큰일”이라며 "허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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