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단식'. 형용모순이다. 세상에 희망적인 단식이 어디 있나.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정리해고가 판치는 세상, 직원들을 내쫓는 데 직장폐쇄 공고문 한 장이면 충분한 나라. 모순투성이 현실에서는 투쟁방식도 모순적이다.

“총연맹 위원장이 연중행사로 단식을 벌이니, 참 ‘모양 빠지는 일’이다. 나도 싫다. 지난해 단식투쟁을 마치면서 결심했었다. ‘내 임기 안에 두 번 다시 단식은 없다’고…. 그런데 갈수록 절망적이다. ‘노동’의 자리가 없다. 싹 다 비우고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여름장마가 끝났다는 기상청의 공식발표가 무색하게 빗줄기가 오락가락. 25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문 앞 천막농성장이 변덕스런 날씨 덕에 한산하다.
 
이날로 희망 단식 13일째를 맞은 김영훈(43·사진) 민주노총 위원장. 면티셔츠에 반바지, 맨발 차림이 나쁘지 않다. 오랜 단식으로 ‘V라인’이 확실히 살아났다. 그러나 낯빛은 어두웠다.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커지기를 반복했다. 초점은 분명했다.

- 단식 13일째다. 어떻게 지내나.
“새벽 5시에 잠이 깬다. 자동차 경적소리나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에 눈이 떠진다. 대한문 앞은 워낙 유동인구가 많아 농성장소로는 딱이다. 아침에 일어나 목용탕에 다녀오는 것이 첫 일과다. 저녁 7시에는 촛불집회에 참석한다. 민주노총 회의와 진보정치 대통합 관련일정, 민중의 힘 회의에도 참여한다. 체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니까. 지금까지는 체력이 버텨 줬는데 앞으로는 모르겠다.”

- 희망 단식. 말 자체가 모순이다. 노동운동의 무기력을 보여 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힘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단식농성을 시작하며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피워 내겠다’고 공언했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이라야 다시 올라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사회의 균형추는 무너졌다. 노동은 없고 자본의 이해에 치우쳐 있다. 탐욕으로 번득이는 자본의 자리에 노동의 희망을 채우자고 결심했다.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조합원들이 함께해 주고 계신다. 오늘도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동조단식을 하러 오셨다. 함께이므로 ‘절대’ 배고프지 않다.”

김 위원장은 외롭지 않으므로 “절대 배고프지 않다”고 했다. 그가 앉아 책을 읽는 작은 밥상 위에 빨간 장미 세 송이가 꽂힌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농성장 안에서도 장미꽃은 싱그럽다. 지나가던 시민이 “힘내라”며 두고 간 것이라고 했다.

- 올해 상반기 민주노총은 국민임투와 진보정당 통합에 주력했다. 하반기 구상을 밝혀 달라.
“위원장 임기 3년 중 절반을 넘겼다. 지난 1년 반, 밀리기만 했다. 노동관계법이 개악되고, 여기저기서 정리해고가 잇따랐다. 말 그대로 전방위적으로 밀리고 터졌다. 남은 1년 반은 승리를 확인하는 민주노총이 될 것이다. 단 한 곳의 사업장에서라도 승리의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한진중공업과 유성기업, 교사·공무원의 정치기본권 보장이 그 시작이다.
조직 내적으로는 지난 임기 동안 성폭력보고서 마무리와 민중진영 상설연대체 건설에 집중했다. 그 결과 민중의 힘이 만들어졌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두 가지다. 진보정치 대통합과 노동자 대투쟁이다. 이를 바탕으로 임기 3년차인 내년에는 세상을 바꾸는 총선·대선 투쟁으로 나아갈 계획이다.”

- 이달부터 복수노조가 허용되고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가 시행됐다. 당초 우려와 달리 양대 노총 간 조직경쟁은 미미한 수준이다. 대신 회사노조(Company Union)가 득세를 부릴 것으로 전망된다. 양대 노총의 공동대응을 기대해도 되겠나.
“양대 노총은 경쟁대상이 아니라고 수차례 밝혔다. 민주노총의 조직화 타깃은 미조직·비정규·중소영세·무노조 사업장이다. 어용·황색·회사노조에 대응하는 양대 노총의 공동행보는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다. 양대 노총이 ‘조직침범 금지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것이 어떠냐는 말을 종종 듣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양대 노총 지도부 간에 이심전심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얼마 전 한진중공업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다.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최근 한국노총 소속 금융노조 외환은행지부의 투쟁현장에 다녀왔다. 김 위원장은 “선의의 경쟁자이자 동반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 한진중 노사교섭이 재개되지 않고 있다. 30일로 예정된 3차 희망의 버스는 여름휴가와 맞물려 2차 때보다 동력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희망버스가 시민들의 자발성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민주노총의 조직력이 발휘돼야 할 것 같은데.
“한진중 회사측은 금속노조와는 교섭을 못하겠다는 입장이다. 말이 안 된다.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에 노사교섭에 대한 체결권이 있다. 정부가 강조하는 '노사 자율'에 입각해 한진중과 금속노조가 교섭을 벌이는 게 맞다. 3차 희망의 버스를 위해 민주노총과 산별연맹들은 열심히 조직화 사업을 벌이고 있다.”

- 다음달 중앙노동위원회에서 한진중 정리해고 사건과 관련해 부당해고 여부를 가리는 판정이 나온다. 정리해고의 요건을 갖췄느냐가 쟁점이다. 앞서 부산지노위는 “사측이 희망퇴직을 받는 등 해고 회피를 위해 노력한 점이 인정되고, 해고절차에 하자가 없다”며 기각결정을 내렸다.
“지난달 대법원은 포항의 진방스틸 정리해고 사건에 대해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는 한 노사가 특별교섭을 통해 합의한 고용안정협약의 효력은 유지된다’고 판결했다. 중노위는 최고 사법기관의 이러한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만약 중노위가 기각결정을 내리면, 민주노총은 중노위 해체투쟁에 나설 것이다. 노동위원회뿐 아니라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와 최저임금위원회 등 노동 문제를 다루는 사안별 사회적대화기구가 현 정부 들어 기능을 상실했다. 기업의 불법을 용인해 주는 기구로 전락했다.”

-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과 4명의 해고자가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이다.
“김 지도위원은 노동의 문제를 잊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노동의 문제를 일깨워 줬다. 실의에 빠진 노동자들에게 좌절하지 말라고 힘을 줬다. 나는 김 지도위원이 노동자와 양심적 시민들을 위해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 매일 크레인의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문득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복지담론에 대한 그의 입장이 궁금했다. 김 위원장은 “노동이 빠진 복지가 얼마나 허망한지 희망의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이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시민은 노동자, 모든 노동자는 시민. "노동기본권을 확장하는 것이야말로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는 첩경"이라고 그는 말했다.

- 내년 정치의 계절을 앞두고 최소한 정치권에서는 ‘노동’이 뜨는 주제가 됐다. 정치권의 행보가 분주하다.
“진보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나라당까지 노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최근 민주당과 무려 2시간30분에 걸쳐 정책협의를 했다. 정치가 힘없는 사람,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치권이 제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진정성과 실효성이다. 노동자와의 정서적 교감이 중요하다. 기존 보수정당의 이른바 ‘좌클릭’이 정책연대를 넘어 노동자와의 교감으로 이어져야 한다. 교감은 말이 아닌 몸으로, 바로 여기 투쟁의 현장에서만 가능하다.
진보정치 대통합도 마찬가지다. 상층부 몇몇의 이야기가 돼서는 안 된다. 투쟁현장의 노동자들에게 대북 문제나 당내 운영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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