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도 둘째도 다쳤을 때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게 소원이에요."
3년차 가정관리사 이아무개(50)씨는 지난달 16일 오후(한국시간) 한국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에서 채택된 가사노동협약에 찬성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 같은 바람을 전했다. 지난해 7월 이씨는 아파트 다용도실에서 넘어져 왼쪽 어깨의 인대가 파열됐다. 다친 어깨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 한쪽 손을 못 쓴다는 이유로 일하던 집에서 해고를 당할까 봐 마음을 졸여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해고되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었어요. 솔직히 다른 고객이었다면 '한 팔로 일을 할 수 없으니 그만 나오라'고 했을 거예요. 절 자르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병원에서는 나이가 있으니 완치될 때까지 쉬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치료비를 벌어야 했던 이씨는 붕대를 감은 채 다친 다음날에도 일했다. 그러다 탈이 났다. 나머지 오른쪽 어깨와 손목에 무리가 생겨 양쪽 어깨를 함께 치료받아야 했다.

"아직 완치가 안 돼 지금도 비만 오면 어깨가 아파요. 만약 산재보험이 됐다면 병원비를 벌려고 그렇게 무리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대부분의 가정관리사들은 나이가 많아 사고를 자주 당해요. 한 번 다치고 나면 또 다칠까 봐 불안감에 항상 긴장을 하게 되더라고요. 산재가 적용돼 부상과 실업에 대한 두려움 없이 편하게 일했으면 좋겠어요."




몸도 마음도 아픈 가정관리사

7개월차 가정관리사 김아무개(46)씨는 마음을 다칠 때가 많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하냐고 묻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인 딸조차도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게 창피하다며 김씨에게 다른 일을 구하라고 면박을 주곤 한다. 하지만 전업주부로 살았던 김씨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식당일과 가정관리사밖에 없었다.

"식당은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잖아요. 또 중국동포가 많아 적응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어요. 새로운 일을 시작할 자신도 없었고요. 가정관리사는 적성에 맞았습니다. 무엇보다 전망이 있어 보였어요. 앞으로 계속 여성들이 일을 할 텐데, 우리 같은 사람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죠."

김씨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일을 하는 게 꿈이다. 노후준비도 하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야유회도 가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이 문제다. 그는 "일을 하는 저와 저를 고용하는 고객은 떳떳하고 당당한데 자꾸 주변에서 '사람이 얼마나 못났기에 그런 일을 하나'라는 시선으로 봐서 어쩔 수 없이 직업을 숨겨야 한다"며 "가정관리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와 김씨처럼 요즘 가정관리사들은 ILO가 채택한 가사노동협약에 희망을 걸고 있다. 정부의 행보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가사노동협약은 가사노동자의 권리를 일반 노동자와 같은 수준으로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내용은 △노동3권 보장·강제노동 철폐·고용상 차별 철폐 △근로서면계약·임금 및 휴가 보장 △알선업체의 사용자성 인정 △가사노동이 이뤄지는 사업장에 대한 근로감독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부가 협약을 비준하고 관련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해당 부처인 고용노동부는 협약 비준에 대해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협약을 비준하지 않을 경우 가사노동협약은 국제기준일 뿐 실효성은 없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가사사용인을 근로자로 보지 않고 있다. 그로 인해 30만명으로 추정되는 국내 가사노동자들이 노동관계법과 사회보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노동부 11월까지 실태조사 진행

노동부 관계자는 "가사노동협약을 비준하기 위해서는 협약과 충돌하는 관련법을 전부 고쳐야 하기 때문에 논의가 필요하다"며 "우선 가사노동자들의 정확한 실태를 알기 위해 올해 11월까지 노동실태와 법적 보호방안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국내 비준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국내 비준에 난색을 표하는 이유는 가사노동의 특성이 일반노동과 다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정의·범위와 고용관계가 각양각색인 데다, 가사노동자들이 비공식 통로를 통해 가정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우리나라처럼 가사노동자에 대해 노동관계법 전반에 걸쳐 적용을 배제하는 나라는 선진국 중 호주와 일본(가정 내 사용자가 직접 가사노동자를 고용한 경우) 정도다. 가사노동에 관한 국가별 입법사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구체적으로는 △특별법령 또는 특별규정 등 명시적인 방식으로 가사노동을 규율하는 방식(핀란드·오스트리아·프랑스·독일·이탈리아·미국) △가사노동을 명시적으로 규율하지는 않으나, 일반적인 노동법령을 가사노동에 대해서도 적용하는 방식(덴마크·네덜란드·영국·미국 캘리포니아) △가사노동에 관한 명시적인 규율도 없고 일반 노동법령의 적용대상에서도 가사노동을 제외하는 방식 (한국·호주·일본)이다. <표 참조>
 


이러한 세계적 추세와 달리 한국은 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후 58년간 가사노동자들을 근기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가사노동협약 채택을 계기로 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는 배경이다. 정부가 발주한 연구용역 보고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008년 노동부 발주를 받아 조사한 '돌봄노동 종사자의 근로여건 실태 조사 및 선진사례' 보고서에서 "돌봄노동의 제공 방식이 변하고 여성일자리인 돌봄노동의 제도화가 사회의 중요한 정책 과제로 떠오른 점을 감안해 근로기준법 배제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장혜경 선임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는 근기법 규정을 삭제해 보호방안을 마련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가사노동자에 대한 근기법상 전면 적용제외 규정을 부분 적용제외 규정으로 개정해 대안을 마련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를 들어 근기법에 근거해 적용이 배제되는 최저임금법상 적용제외 규정을 삭제하고, 근로조건 등에 대해 최저기준을 명문화한 지침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가사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가는 가사노동자의 사용자, 책임 분담해야

사용자를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시작되고 있다. 노동계는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을 높이고 가사노동을 사회화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인 만큼 정부가 사용자로서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성·노동단체로 구성된 '돌봄노동자 법적보호를 위한 연대'(돌봄연대)는 “높은 수준의 알선료를 받고 사실상 사용자 역할을 하는 직업알선업체들이 사용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며 “가사노동자들의 노동조건 향상이 가정의 지출확대로만 여겨지지 않도록 세금 감면 등의 혜택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적기업을 육성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정부는 보건복지부의 바우처 사업 등을 통해 비영리 기관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돌봄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최영미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 사무처장은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등록되지 않은 비공식 부문의 노동을 공식화하고, 사회보험을 적용받는 통로로 활용하면 된다”며 “정부가 사회적기업을 지원하고, 취업알선과 교육·근로감독을 통해 사회적기업이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견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산재·고용보험 적용 시급

가사노동자의 사용자를 분명하는 것과 함께 사회보험 적용 또한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다. 적지 않은 가사노동자들이 실업과 산재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보험료는 가사노동자들에게 만만찮은 부담이 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08년 가사노동자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에 대한 가입의사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연금의 경우 가입하고 싶지 않다는 답변이 66.2%로, 가입하고 싶다는 답변(33.8%)보다 더 높았다. 건강보험도 가입하고 싶지 않다는 응답이 70.5%로 가입을 원하는 이들(29.5%)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상대적으로 고용보험과 산재보험 가입을 원하는 비율이 높았다. 고용보험 가입은 41%가 원했고, 59%는 원하지 않았다. 산재보험 가입은 45.4%가 원했고, 53.1%는 원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연구원은 “돌봄노동의 공공성과 취약여성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 확보 측면에서 보험금 일부를 국가가 감면해 주거나 특수고용노동자들처럼 특례조항을 신설해 이들을 사회보험 가입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가사노동자들은 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에 묶여 5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법적 사각지대에 있다. 반면에 정부가 실시하는 공공서비스 사업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요양보호사·노인돌보미, 산모·신생아돌보미는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을 적용받고 있다.

고령화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 등으로 인해 가사노동자의 역할이 필연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문제는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가사노동을 양질의 일자리로 발전시켜 나가느냐다. ILO는 지난달 총회에서 가사노동협약을 채택했다. 정부가 가사노동협약을 비준하고, 하루빨리 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