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의 곳간이 비어 가고 있다. 의무금 납부율이 급감하면서 중앙과 지역조직 모두 가난해지고 있다. 지난해 6·2 지방선거 이후 이른바 '공동지방정부'를 구성한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지역예산이 노동친화적 사업에 투입되는 사례가 늘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노동계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매일노동뉴스>가 그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민주노총 사무총국과 지역본부 사무처 상근자들의 월급이 체불되고 있다. 이들에게 ‘마냥 참으라’고만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그것도 일종의 노동착취다. 결국 대출을 받아 이달 월급을 지급했다.”

민주노총 주요 관계자의 말이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민주노총의 재정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다. 2009년 79%대를 유지했던 의무금 납부율이 지난해 67%로 낮아졌고, 올해 6월 현재 65%까지 떨어졌다. 걷히는 돈이 줄다 보니 예산도 감소했다. 지난해와 비교해 올해 예산이 10억원가량 줄었다.

각종 투쟁에 따른 소송비나 일부 임원에 대한 임금도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 사무처에 할당된 인력도 채우지 못한 상태로 조직이 운영되는 실정이다. 지역본부의 사정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민주노총 중앙에서 내려보내는 사업비 규모가 열악하다 보니 지역별 분담금이 늘고 있다. 중앙과 지역 모두 재정운영의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재정악화는 앞으로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최근 2년6개월 사이 민주노총 소속 62개 노조 5만4천여명이 총연맹을 탈퇴했다. 민주노총 재정수입의 밑바탕을 이루는 중견규모 노조들의 이탈이 눈에 띈다. 여기에 지난해 7월부터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이 금지된 것이 재정악화를 부추기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1월 열린 정기대의원대회에서 국가재정 활용방안을 모색한 바 있다. 진보정당의 국회 진출과 지방정부권력 재편 등 환경변화에 따라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받는 보조금의 활용 폭을 넓혀 보자는 것이다. 기존 건물 유지·관리비에서 미조직·비정규사업까지 지원금의 폭을 넓히는 내용이다. 하지만 해당 안건은 심의 과정에서 표결을 위한 재석인원 부족으로 처리되지 못했다.



바닥 드러낸 노동계 '곳간'

이런 가운데 지난해 6·2 지방선거 등에서 야권이 단일후보를 내고 민주노총과 진보적 시민·사회단체의 지원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경남·인천·충남·강원 등 광역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실험이 진행되고 있어 주목된다. 노동현안에 대한 지역 차원의 논의틀이 만들어졌고, 지자체 예산으로 사업이 집행되기 시작했다. 노동 문제에 대한 지역 차원의 사회적 대화가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말라 가고 있는 노동계의 곳간을 대신할 화수분이 될 수 있을까.

지난 21일 오후 고용노동부 천안지청에 유성기업 노사가 마주 앉았다. 노사는 두 시간여의 대화 끝에 의견차이만을 확인한 채 헤어졌지만, 이러한 만남이 성사되기까지 50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유성기업 노사를 한자리로 불러내는 데에는 ‘충청남도 노사민정협의회’의 압력이 작용했다.
 
충남은 지난해 12월 조례 제정을 통해 기존 ‘충청남도노사민정협의회’에서 ‘충청남도 노사민정협의회’로 조직을 개편했고, 지난달 27일 열린 첫 전체회의의 안건으로 ‘유성기업 사태’를 채택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 주재로 열린 이날 회의에는 노동자위원 9명(한국노총 5명·민주노총 4명) 등 총 29명의 위원과 2명의 간사가 참여했다. 협의회는 “노사분규 장기화로 지역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만큼 중단된 노사대화가 조속한 시일 안에 재개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의 권고안을 채택해 노사에 전달했다. 또 협의회 소속 노동자위원과 사용자위원이 노사를 적극적으로 설득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러한 노력이 바탕이 돼 노사교섭이 재개된 것이다. 안희정 지사는 “충청남도에 노사갈등 문제 해결을 위한 매뉴얼과 관련 TF팀을 만들겠다”며 “사용자와 노동자측이 진정성 있게 문제를 해결할 목록을 정리해 오면 이를 도가 취합해 갈등 중재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도는 올해 초 인천에서도 있었다. 한국지엠에서 근무하다 해고된 사내하청 비정규 노동자 2명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부평공장 앞에서 고공농성을 벌이자 지역의 노동·시민단체와 인천시가 의기투합했다. 그 결과 해고자들의 순차적 복직으로 문제 해결의 가닥이 잡혔고, 인천시와 민주노총 인천본부가 힘을 모아 분규를 해결했다. 모범사례가 만들어진 셈이다. 당시 송영길 인천시장은 마이크 아카몬 한국지엠 사장을 면담하고, 직접 쓴 영문편지를 보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등 적극적 행보를 했다.

이러한 ‘사건’을 경험한 뒤 송 시장은 민주노총 인천본부가 참여하는 노사민정협의회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어차피 나는 야권단일화의 결과로 당선된 시장”이라며 “인천시 노사민정협의회에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야권연대를 통해 정권을 교체한 경상남도의 경우 지역예산 2억원이 투입된 비정규직근로자지원센터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 지역의 돈으로 해고노동자들의 생계를 보호하는 사례도 눈에 띈다. 과거 고용노동부가 관할하던 사회적기업이 지방정부로 이관되면서, 경남 창원 대림자동차 해고자들이 세운 사회적기업이 경남도청 구내식당에 식자재를 납품할 수 있게 됐다. 경남도는 3천여명에 달하는 무기계약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임금인상과 호봉제를 도입했다. 이는 민주노총 경남본부의 조직확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성과의 중심에 경남 민주도정협의회가 있다. 야권의 선거연합과 후보단일화의 상징인 도정협의회는 노동·시민·사회단체와 야권연대에 참여한 정당·도지사가 추천한 인물이 참여하는 일종의 도정 자문기관이다. 경남도와 협의회 간 사업공조는 계속되고 있다. 경남도는 도정협의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내 노동자 실태조사에 나설 계획이다. 이와 별개로 협의회는 자체 의결을 통해 관내 기업에 노동계의 요구사항이었던 ‘최저임금 시급 5천410원 적용’을 권고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방공동정부 수립에 성공한 지역에서 지자체와 노동계가 지역 노사현안의 해결사로 함께 나서거나, 노동정책 입안의 파트너로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걸음마 뗀 '지역 사회적대화' … 소극적인 노동계

의아한 것은 이들 지역 노동계의 태도가 지나치게 수동적이라는 점이다. 특히 해당 지역 민주노총 지역본부들의 입장이 모호하다. 충남 노사민정협의회에 노동자위원으로 참석하고 있는 정원영 민주노총 충남본부장은 “충남본부의 입장은 노사민정협의회라는 제도권 내 상설논의기구에 참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특정 현안에 대한 사안별 협의기구에 참석한다는 것”이라며 “유성기업 문제에 대한 협의회의 권고가 지역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에는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지만, 권고사항이 강제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협의회 참여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한 발언이다.

정 본부장은 지자체로부터 사업비 지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그는 “노조의 자주성이 훼손될 수 있고, 지자체의 지원에 의존하다 어느 날 갑자기 지원이 끊기면 해결책을 찾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인천본부도 비슷한 상황이다. 전재환 인천본부장은 “노사민정협의회가 노동 문제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는 민관단체라는 것을 감안하면, 협의회에 참여한들 실효성이 의심되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지엠 사내하청 고공농성 사태가 해결된 뒤 노사민정협의회 가입을 긍정적으로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던 인천본부는 이 같은 이유로 현재 협의회 가입을 고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 본부장은 지자체로부터의 사업비 지원을 받는 것에 대해 조건부로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그는 “지자체로부터 노조운영을 위한 사업비를 지원받는 것은 노조 스스로의 자주성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면서도 “노조 밖 노동자, 영세사업장 노동자나 비정규 노동자의 권리찾기 사업과 같은 공익적 사업을 위한 예산지원은 받을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사회적대화, 금기 깰 때 됐다"

민주노총 지역본부들의 이 같은 조심스러운 입장은 민주노총의 오랜 방침과 연관돼 있다. 민주노총은 98년 정리해고가 법제화되고 파견법이 제정되면서 노사정위원회에서 탈퇴했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실패 경험은 조직내부에 심각한 분란을 초래했다. 2005년 2월 소화기와 시너가 난무했던 대의원대회의 주요 안건 중 하나는 ‘사회적 교섭 안건’이었다.

이러한 갈등을 겪으며 사회적 대화는 민주노총 내에서 일종의 금기사항이 됐다. 시대가 변해 노동계가 지원사격을 한 후보자가 지자체의 수장으로 당선된 상황에서도, 사회적 대화에 대한 금기는 좀체 깨지지 않고 있다. 노사정위 불참 방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실 지역 노사민정협의회 참여에 대한 민주노총의 명확한 방침은 없다. 그럼에도 조직정서상 금기시되는 분위기다.

이러한 조직방침이 민주노총 스스로의 활동반경을 제한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변화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민주노총의 방침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방침에 사로잡혀 머뭇거리기보다는, 정부 예산을 최대한 활용해 다각적인 사업을 펼치는 편이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박유호 민주노동당 경남도당 상근부위원장은 “민주노총과 지역본부가 사무처 활동가들의 월급조차 제대로 못 주는 마당에 조직사업이 제대로 진행되기는 어렵다”며 “당장 의무금을 올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노동계가 지자체 차원의 협의테이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지역의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친화적 사업을 계속 만들어 내고 이를 관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자체로부터 사업비를 직접 받지 않더라도, 협의테이블에 참여해 해당 사업을 집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자체 안에 열려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석영철 경남도의원(민주노동당)은 “지자체 안에 노동거점을 형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노동계가 노동친화적인 정책을 개발하고, 예산편성에 대한 적극적인 마인드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대한 기존의 금기·부담감에 지역의 변화된 상황을 어떻게 접목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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