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중에 남은 돈이 2천700원인데 이 돈으로 피시방에 와서 인터넷을 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전화드릴 돈이 없습니다. 당장 먹을 쌀이 없는 상황입니다. 굶게 생겼습니다. 일단 죽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외면 마시고 도와주십시오. (휴대폰은) 문자 수신밖에 안 되는 상황이라. 공중전화로 전화드릴 돈이 없어 마지막 현찰로 이메일을 보냅니다. 이제 피시방도 못 올 만큼 다급해서요.”

최근 한 노동운동 활동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정규직 투쟁현장을 누비며 동영상 촬영을 해 온 고 이상현(48)씨. 자신의 본명 머리글자인 ‘ㅅ’과 ‘ㅎ’을 따 ‘숲속 홍길동’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해 온 이씨는 지난달 25일 인천 연수동의 반지하 무보증 월세방 문고리에 수건으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마지막 현금 2천700원으로 ‘SOS’를 보낸 지 46일 만에 싸늘한 시신이 돼 나타난 것이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발견 당시 시신은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고, 고인의 트레이드마크인 꽁지머리를 보고서야 신원확인이 가능한 상태였다. 3개월째 방값이 밀린 고인의 단칸방에는 빈 소주병만 뒹굴고 있었다.
고인은 2004년까지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한국전력공사에 다녔으니 흔히 말하는 ‘귀족노동자’였다.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9~2000년에는 노조간부로 활동하며 ‘한전 민영화 반대투쟁’에도 참여했다. 앞서 96년에는 노조 직선제 투쟁을 벌이다 분신사망한 동료 노동자 김시자씨의 죽음을 목격했다. 죽은 동료에 대한 영상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회사에도 노조에도 자기편이 없었던 고인은 2004년 직장을 그만두고 영상 활동가로 새 삶을 시작했다.

그는 퇴직하기 전 구입한 6밀리미터 카메라를 들고 노동계 투쟁현장을 누볐다. 이주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농성현장, 이랜드 노동자들의 홈에버 상암점 점거현장,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옥쇄파업 현장, 재능교육지부의 천막농성 현장까지….

하지만 어렵사리 만들어진 고인의 영상은 한 번도 제값을 받지 못했다. 영상을 찍고 편집해서 온라인에 올리는 그의 노동은 늘 헐값 취급을 받았다. ‘카피레프트’(창작물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라는 이름으로 거저가 되는 일도 많았다. ‘활동’이나 ‘연대’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엔 그의 처지가 너무 궁핍했다.

고인은 죽기 얼마 전 목숨처럼 아꼈던 캠코더와 노트북을 분실했다. 그저 흔한 촬영도구가 아니었다. 배고픈 그를 지탱하고 활동가로서 품위를 유지시켜 준 삶의 기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자부심이나 당위성만으로 지울 수 없는 엄연한 생계의 어려움, 그보다 더 큰 생존에 대한 상실감. “일단 죽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라던 그는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고인의 죽음은 지난해 숨진 인디 뮤지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본명 이진원)'과 올해 초 생활고와 지병에 시달리다 사망한 무명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 모두 기초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영역에서 안타깝게 죽어 갔다. 다만 다른 점은 앞선 두 명의 죽음이 수많은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최소한의 사회적 관심이라도 받았다면, 숲속 홍길동 이상현씨의 죽음은 쓸쓸했다. 노동계조차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하다.

고인과 함께 한전노조 민주화투쟁을 벌였던 이호동 민주노총 노동위원회 사업단장은 “누가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노동현장에 찾아가 그들의 투쟁을 영상에 담았던 이상현 동지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게 돼 너무나 애통하다”며 “조직에서 떨어져 홀로 활동하는, 또는 조직에서 은퇴한 활동가들을 보듬기 위한 노동계 차원의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난달 29일 고인의 장례식에 모인 지인들은 “이래서는 안 된다”며 대책을 찾기 시작했다. 노동계 안에서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긴급구제기금을 조성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노동계가 일종의 펀드를 조성해 생계의 낭떠러지까지 몰린 활동가들을 구제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에 노동계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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