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노조 경영을 표방해 온 삼성이 국제노동기구(ILO)에 ‘노조가 아닌 근로자 대표제’의 요건에 대해 공식질의했던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2일 <매일노동뉴스>가 삼성경제연구소 인사조직실이 작성해 지난 2월 ILO에 전달한 설문조사서를 입수해 살펴 본 결과다. 삼성이 7월 복수노조 시행에 앞서 일종의 출구전략을 모색한 것으로 분석된다.

연구소가 작성한 설문조사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노조가 아닌 근로자 대표제’(NER, Non-union Employee Representative System)를 언급한 대목이다. 연구소는 “(ILO 87호) 협약에 따른 NER의 조건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48년 만들어진 ILO 87호 협약(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은 단결권 보호의 대상을 노조로 한정하지 않고, 노동자 또는 근로종사자로 조직된 조직들(Workers' and employers' organizations)로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이 협약이 국회와 정부에 의해 비준될 경우 특수고용직처럼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직종의 노동자들도 임의단체를 만들면 교섭권을 인정받게 된다. 협약을 비준하고도 특정 직종 노동자의 교섭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국제협약에 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노동계는 줄곧 한국 정부를 상대로 “1LO 87호 협약을 비준하라”고 요구해 왔다.

삼성이 이러한 내용의 ILO 87호 협약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노동법 전문가들은 복수노조 시행시 무노조 기업에서 노조가 아닌 임의적 단체를 통한 교섭창구 단일화 시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김철희 공인노무사(법률사무소 참터)는 “무노조 기업의 경우 단결권 행사의 범위를 확장해 노조가 아닌 노동자단체도 창구단일화 절차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노사교섭 외에 노사협의회를 실질적 교섭창구로 활용함으로써 임의적 노동자단체를 노조 대체기구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가능하려면 한국 정부가 ILO 87호 협약을 비준해야 한다. 삼성이 복수노조 문제와 연계해 해당 협약의 활용도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협약이 비준되면 예컨대 삼사모(삼성을 사랑하는 노동자 모임)와 같은 임의단체가 만들어져 교섭에 임할 수 있게 된다. 삼성으로서는 무노조 방침을 고수하면서도 국제기준에 따라 교섭권을 인정했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연구소는 ILO로부터 해당 질의에 대한 답변을 받아 놓은 상태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설문조사는 연구소의 노동법제도 연구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며 “ILO의 답변서는 대외비 사항이라 공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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