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형 종합병원 간호사 A씨는 나이트 근무를 하던 중 혈액암 환자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했다. 다행히 혈액형이 같아 환자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지만 자칫 환자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사고였다. 결국 그는 사직서를 내고 현장을 떠났다. 근무 당시 현장은 암환자가 많은 병동이었지만 간호사 2명이 환자 43명을 돌봤다. 암환자 등 중증환자가 많은 병동에서는 오히려 낮보다 밤에 고열이 나거나 진통이 심해져 증상이 악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2명의 간호사가 체온·혈압을 재고 약 등을 챙기느라 밤새 기계처럼 복도를 뛰어다녀야 한다. A씨의 동료는 “기본적으로는 아무리 인력이 부족해도 환자의 안전을 위협해서는 안 되는 게 원칙이지만, 간호사의 능력과 상관없이 순간적으로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며 “이번 사고도 인력이 더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임신은 재앙과도 같다. 간호사와 약사는 동료들끼리 서로 순번을 정해 임신을 해야 한다. 덜컥 임신이라도 되면 사측보다도 동료들의 눈치를 더 살펴야 한다.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한 약사는 "임산부의 야간근로가 법으로 금지되면서 임신하지 않은 동료들의 나이트 근무가 더 빨리 자주 돌아오게 된다”며 “병원에서 대체인력을 투입하지 않기 때문에 동료들 보기 미안해 결국 못 견디고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대한적십자사가 운영하는 혈액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B씨는 방광염을 앓고 있다. 밀려드는 헌혈자로 인해 화장실을 마음 놓고 다녀올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하루에 받는 헌혈자는 20명에서 50명까지 대중이 없다. B씨는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는 최소한 인력투입의 기준이 되는 의료법이라도 있지만 혈액원은 헌혈자 침상수 대비 간호사수에 대한 기준 법령조차도 없다”며 “일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갑자기 시민들이 밀리면 헌혈자를 검진하는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오류를 내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병원의 만성적인 인력부족 문제가 환자와 일하는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이들이 모두 만족하는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보건의료노조는 3일 "병원 인력부족 문제 해결을 올해의 핵심 과제로 선정하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담보하는 인력 기준을 마련할 수 있도록 병원인력법 제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노조는 병원의 현실을 국민에게 알리고, 환자단체 등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활동을 전개할 방침이다.

한국, 병원 인력부족 심각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실제로 국내 의료인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도 안 된다. 평가원이 지난해 국내 등록현황을 2008년 OECD 자료와 비교한 결과, 병원수·병상수와 특수·고가의료장비 보유수는 한국이 월등하게 높았지만 의료인력수는 부족했다. 인구 1천명당 의사수는 2.01명으로 OECD 평균인 3.11명보다 적다. 치과의사와 약사수도 각각 0.43명과 0.66명으로 OECD 평균인 0.62명과 0.74명보다 낮았다. 특히 간호사의 경우 인구 1천명당 2.37명으로 OECD 평균(6.74명)에 크게 못 미쳤다.<표 참조>
 
 



보건복지통계 연보(2008년) 의료인력 관련 통계에 따르면 면허를 가진 의사의 약 77%, 간호사의 약 41%, 의료기사의 약 45%만이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사를 제외한 의료인력이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비율이 절반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이직률이 높아지면 환자의 투약오류, 병원감염 증가 등 환자만족도가 떨어진다. 인력이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되지 않으면 의료서비스의 질이 낮아지고, 이는 곧 환자들에게 해로운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력부족해 환자 안전도 '꼴찌'

보건의료노조와 충남대 의학전문대학원 예방의학교실이 지난해 9월 '한국 병원인력 수준과 병원의료의 질에 대한 국제 비교연구’를 한 결과 인력난으로 인해 환자의 안전도가 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연구는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5개국(미국·캐나다·잉글랜드·스코틀랜드·독일) 간호사의 직무만족도를 비교 분석한 것이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환자 낙상’을 경험한 간호사의 비율은 한국이 58.8%로 가장 높았다. 이는 5개국 중 가장 높은 스위스보다 17.1%포인트 높은 수치다. 그 외에도 약물투여 오류(33.1%)·병원 내 감염(49.5%)·중대한 사고(21.2%)·욕창(43.1%) 등을 경험한 간호사의 비율도 한국이 비교 국가에 비해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지난해 병원에서 제공된 의료서비스의 질이 악화됐다’고 응답한 간호사의 비율은 한국이 67%로 가장 높았다. 5개국 중 가장 높은 미국에 비해 22.2%포인트가 더 높은 것이다. ‘환자들에게 양질의 간호 서비스를 제공할 만큼 인력이 충분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6%에 불과했다. 가장 낮은 잉들랜드도 29%나 됐다. ‘환자에 대한 간호계획을 세우거나 갱신하지 못했다’고 답한 간호사의 비율도 한국이 70.7%로 가장 높았다.

환자의 안전과 간호사수의 상관관계를 보여 주는 해외사례도 있다. 미국의 헬스케어메디컬 매니지먼트는 2008년 보고서를 통해 “간호사 1명 증가시 중환자실 사망환자가 9% 감소하고 내과환자와 일반환자는 각각 16%, 6% 감소한다”고 밝혔다. 또 미국 의협저널은 2002년 "간호사 1인에게 기본 4명의 환자 외에 1명을 추가할 때마다 사망률이 7% 증가한다"며 "간호사에게 할당된 환자수와 비율이 늘어날수록 불만과 소진의 정도도 커진다"고 보고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인력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90년대 후반부터 간호사와 환자의 비율을 법으로 제정해 이를 의무화하고 있다.<사진 참조>
 
 



반면 우리나라는 의료인 정원이 의료법에 명시돼 있긴 하지만 벌칙이 없어 기준에 미달하는 병원들이 많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2006년 의료기관평가 결과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300병상 미만인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한 의료기관 평가 결과 법적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의료기관이 50.9%에 달했다. 적절한 수준의 의료 인력과 의료서비스 질 확보를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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