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정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라고 국어사전은 정의(定義)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심이 높다. 하버드대 교수의 강의록을 모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왜 사람들은 국어사전에 정의돼 있음에도 정의란 무엇인가를 찾는가.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 것일까. 그것은 국어사전으로는 사람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어사전만으로는 정의로운 세상을 무엇인지 제시할 수 없고, 사람들에게 정의롭게 살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실천지침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인지를 말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정의가 무엇인가에 관해 지난해 사람들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교수와 학생, 사용자와 노동자, 일반 시민과 활동가를 막론하고 마이클 샌델의 책을 읽고 정의에 빠졌다. 모두가 열심히 정의가 무엇인가를 읽었다.

2. 사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의 책에서 말하는 정의론에 관해 이미 우리는 모두 배웠다. 아리스토텔레스·칸트·공리주의·롤스 등 정의에 관한 이러저러한 정의와 주장에 관해 이미 학교에서 배웠다. 그리고 도덕적 딜레마 어쩌고 하는 것도 이미 토론과 논술의 주제로 또는 잡담거리로 이미 수도 없이 말했다. 그래서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는 그의 결론 앞에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그 결론은 국어사전의 정의의 정의만큼이나 공허했다. 정의를 고민해라. 그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정의는 미덕이고 공동선이라면 무엇이 미덕이고 공동선일까. 결국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결국 정의를 고민하는 것이 정의라고 그는 말했다. 사실 그랬다. 이 세상에서 거창한 진리라고 떠들고 받들어지는 것들은 언제나 그랬다. 이 세상에서 진리, 정의 등의 물음에 대한 정답은 언제나 동어반복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선 동어반복을 제외하고는 정답은 없었다. 다만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동어반복이 아닌 냥 하여 이를 정답이라고 할 뿐이다.

3. 왜 이 세상에선 진리와 정의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동어반복일까. 당신이 저명한 아무개 교수 또는 선생님께 정의가 무엇인지 물어보라. 그러면 정의를 정의한 국어사전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 외에 다른 대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정의는 정의를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교수 또는 선생님을 볼 것이다. 왜 당신의 교수 또는 선생님은 정의는 정의라고 동어반복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진리와 정의가 노동과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에 발을 딛지 않고 그 진리와 정의가 서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래 왔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진리와 정의는 그런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진리와 정의는 노동의 생산물이 아니었다. 노동의 생산물을 차지하고 노동을 지배하면서 이 세상에서 진리와 정의가 세워졌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진리와 정의는 노동과 관계없이 구체성 없는 추상화로 그들의 경전에 새겨졌다. 그리고 높이 성인반열에 든 그들의 스승들의 가르침은 끊임없이 다음 세대로 전승됐다. 그래서 오늘도 읽어야 하는 우리의 교과서에는 온통 동어반복만 난무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진리와 정의인 그것을, 동어반복해 가르쳐진다. 이 세상에서 말해지는 진리와 정의는 노동자에게도 자본가에게도 공통적이다. 노동자에게도 자본가에게도 타당한 진리요 정의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왔다. 그 진리와 정의 속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 진리와 정의에 순종하면서 그들의 진리와 정의에 복종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왔다. 그들의 말은 그래서 적법한 것이었고 정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지배는 적법하고 정당했다. 그래서 그들을 비난한 우리의 행동은 일탈이고 부당이고 불법이었다. 그렇게 그 진리와 정의는 이 세상의 질서와 법에 새겨졌다. 경전이 법전이 됐다. 동어반복인 진리와 정의를 말하면서 그들의 질서와 법은 세워졌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질서와 법이 진리와 정의가 됐다. 따라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이 세상의 질서와 법을 비난하는 것이었고, 결국은 진리와 정의에 반하는 것이 됐다. 오늘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의 산출물은 가져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 세상의 질서와 법은 그것을 불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요 정의라고 말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노동의 산출물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고 자본가의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시장이라고 해서 국가와 구별짓는다. 시장질서와 국가질서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며 국가권력이 함부로 시장에 침범하는 것을 제한한다. 그래서 그들에겐 진리와 정의는 국가의 문제일 뿐이다. 언제나 국가 개입의 문제일 뿐이다. 시장 자체를 진리와 정의로 문제 삼지 않는다.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는 진리와 정의를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의 독점과 비정상적인 폭리에 대해선 진리와 정의를 들이대 국가를 개입시키지만 시장 자체, 노동과 자본의 생산관계에는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것은 인간의 질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이전의 질서이고 인간의 진리와 정의가 개입할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법 제도로 굳이 명시할 필요도 없는 법 이전의 질서였다. 그 질서 위에 이 세상의 법제도는 세워졌다. 그러니 오늘 노동자가 사업장에서 자신이 노동한 산출물을 퇴근하면서 집으로 가져간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법질서 위반이고 정의가 아니다. 불법으로, 절도죄로 민형사상 책임을 당연히 지게 된다. 왜 당연히 지게 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대해 이 세상의 진리와 정의 속에서, 법제도 속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이 세상에선 진리와 정의에 관한 질문에 추상적인 동어반복 외에는 정답이 없다.

4. 그러나 노동은 이 세상의 것이다. 노동은 인간의 것이다. 인간 이전에는 노동은 없었다. 인간 이전 세상, 즉 낙원에선 노동은 없었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 있을 때 그들의 창조주는 그들에게 노동하게 하여 그 노동의 산출물을 빼앗아가지 않았다. 낙원에선 노동자의 노동의 산출물을 차지하는 자본가는 없었다. 그 뒤 노동에 의해 이 세상은 왔다. 그래서 노동을 제외하고 이 세상을 정의하는 것은 거짓이다. 노동을 배제하고 이 세상에서 진리와 정의를 말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수천 년을 철학과 사회과학을 세웠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진리와 정의를 운운하는 철학과 사회과학은 모두 공허한 말장난일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칸트가, 벤덤과 롤스가, 그리고 하버드의 마이크 샌델이 노동자에게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노동하는 자와 그 지배자, 즉 노예와 주인, 노동자와 자본가를 초월해 추상화된 인간 일반의 정의에 관해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의 진리와 정의에는 노동이 없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은 노동에 의해서 왔다.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 우리의 세상은 만들어졌다. 구체적인 노동을 말하지 않고 진정으로 정의를 말할 수 없다. 지배받는 노동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이 세상에서 정의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노동의 지배자를 부정하지 않고 말하는 정의는 노동이 없는 졸리운 추상화일 뿐이다. 도대체가 어린아이가 장난삼아 아무렇게나 한 낙서와 그들의 그림은,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구별되지 않는다. 노동이 없는 정의는 기껏해야 노동의 지배자의 주머니에서 적선할 것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은 그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그 적선을 세금을 통해 복지로 말하는 것이 그들의 미덕이고 공동선이다. 노동하는 자를 적선의 대상으로, 노동의 지배자를 미덕과 공동선, 즉 정의의 실현자로 만들었다. 실제로 그렇게 우리는 수천 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인간의 세상에선 언제나 미덕과 공동선의 실현자는 노동하는 자가 아니라 노동의 지배자였다. 지금까지 수천 년의 인간 역사에서 당신이 알고 있는 위대한 자들을 생각해 보라. 위대한 자들은 노동하는 자가 아니었다. 노동하는 자를 직접 수탈하는 자이거나 정신적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자였고 자신이 노동하는 자는 아니었다. 우리의 세상에선 노동하는 자는 위대할 수가 없다. 노동하지 않는 그들을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노동하는 자는 그 정의의 실현자가 될 수 없다. 오직 강요된 노동을 박차고 나와서만, 노동을 하지 않음을 통해서만 노동하는 자들은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낱 노예나 농노가 위대한 자가 되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진실의 실체가 추악하고 슬프지만 그래도 그것이 인간의 역사였다. 이런 세상에서 정의를 말하는 것이 공허한 거짓말이 아니려면 당신은 노동에 굳건히 서서 말해야 한다. 노동하는 자의 노동을 빼앗아 지배하고 노동의 산출물을 차지하는 노동의 지배자를 위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 노동의 지배자를 부정하기 위해 그가 말한다면 그의 정의는 공허한 동어반복이 아닐 수 있다. 구체적인 노동을 떠나서 말하는 정의는 아무리 유명한 아무개의 말이라도 이 세상에선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