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1년이다. 모두들 2011년이 왔다고 새날이 올 것처럼 다짐하고 축하해댄다. 방송과 신문의 한켠을 차지하는 인사들의 신년사로부터 노조활동가의 문자메시지까지 새해다짐이 넘쳐난다. 얼마전 구입한 스마트폰 때문에 페이스북에 정신을 팔렸다가 거기에 올라온 ‘친구’의 새해다짐들을 보고 그만 필자도 덩달아 날뛰고 말았다. 혼자서는 이상한 행동도 집단이면 자연스런 행동이 된다. 직접 대면해선 할 수 없는 말도 인터넷 게시판 앞에선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필자는 페이스북에 아래와 같은 새해다짐을 게재하고 말았다.

2. “2010년도 갑니다. 불온한 파란만장도 없이 희망찬 다사다난도 없이 그저 그런 한해가 지나갑니다. 권력을 잃은 세력에겐 파란만장하고 다사다난한 세월이었을지 몰라도 노동자에겐 불만스런 평화가 지속된 한해였습니다. 더 이상 권력을 상실한 자의 나부랭이를 듣기 싫습니다. MB가 어떻게 저떻고 그래서 결론은 자신들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 주절거림이 속속들이 보여 보기 싫습니다. 그렇게 2012년을 말하며 덩달아 함께 춤추는 자의 언어도 지겹습니다. 그저 노동의 언어로 평화가 굴종의 침묵이라고 내뱉는 당신에게 2011년은 2010년이 아니기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3. 도대체 무엇일까. 미처 일일이 확인하고 읽을 수조차 없이 많은 새해다짐들은 왜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것일까. 방송과 신문을 장식하는 자들의 신년사에는 관심이 없다. 노동자를 말하는 노동자조직 대표의 신년사에도 사실은 큰 관심이 없다. 노동현장의 노동자 정서를 대변하는 그들의 새해다짐은 다르다.
 
그런데 그들의 새해다짐이 왜 그 모양인가. 그들의 언어는 노동자의 다짐이어야 한다. 그들의 다짐은 노동자 일반의 분노와 바람이 담겨야 한다. 노동자의 분노가 없는 그들의 다짐은 노동자의 다짐일 수 없다. 노동자의 바람이 없는 그들의 다짐은 노동자의 바람일 수 없다. 신년하례식으로 전태일 묘소에 참배하고 소리 높여 다짐한다고 해서 모두가 노동자의 다짐인 것이 아니다. 진정 우리는 노동자의 분노로 다짐하고 있는 것일까.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소리 높여 ‘비정규직차별철폐투쟁가’를 부른다고 해서, 한나라당이 아닌 정당으로 정권교체를 위해 민주주의를 외쳐댄다고 해서, 자주통일을 위해 반전평화집회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자의 노래고 구호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다짐은 노동자의 언어가 아니었다. 근로조건이 열악한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서는 노동자가 아니라도 이 세상에선 거의 모든 사람이, 심지어 친자본의 대변인조차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노래한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자의 노래일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노래만 부르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노래해왔다. 자본가조차도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만을 부르고 있다.
 
최저임금투쟁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양심적인 자라면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우리는 노동자 일반이 함께 분노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의 처지가 사회적으로 열악하기 때문에 노동운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굳이 노동운동이 아니라도 시민적 양심에 호소하는 시민계급의 운동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민변 노동위원회 등 각종 시민사회단체는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 초기 영국에서 차티스티운동이 그러했다. 양심적인 부르조아들이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운동했다. 국가권력에 의해서도 열악한 노동자의 처지는 개선되었다. 독일에서 사회주의자탄압법으로 노동운동을 탄압했던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복지제도를 도입했다. 노동운동은 노동자 일반의 분노를 조직해야 한다. 오늘 2011년 노동자조직 대표의 신년사와 노조활동가의 새해다짐에는 노동자 일반의 분노가 없다. 노동자 대표조차도 분노할 수 없을 정도로 오늘 우리의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분노를 조직하는데 실패했다.
 
오늘 정규직 노동자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분노하지 않는다. 도대체가 분노할 수조차도 없다. 무엇 때문에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이 분노하겠는가. 고용이 보장되고 임금 등 근로조건이 보장되어 있는 노동자들은 분노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사용자가 갑작스럽게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을 단행한다거나 임금인상을 위한 교섭을 위해서만 분노할 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주문하는 것은 연대뿐이다.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라고 금속노조는 주문한다. 이렇게 노동운동은 실패하고 있다. 노동자 일반을 노동운동의 연대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연대 대상은 노동자 일반이어서는 안된다. 노동운동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필요에서 노동자가 아닌 자들과 연대할 수는 있어도 노동자 일반과는 연대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노동운동을 일부 노동자의 분노로서 조직된 협소한 운동으로 축소시킨 것이고 그것이 전부이거나 주된 것이라면 그것은 노동운동의 실패가 아닐 수 없다. 왜 이렇게 우리의 노동운동은 실패했을까. 우리의 노동운동은 대표제 내지 대의제로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조직의 대표(임원, 간부 모두를 포함하여)가 의결하고 집행한다. 당연히 대표의 의지가 노동자조직의 의지가 된다. 대표제이니 오늘 노동운동의 실패도 대표의 실패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2011년 1월 4일, 노동자조직의 대표는 노동자 일반의 분노를 모른다. 사회적으로 열악한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호소하고 투쟁하는 것이 그들의 의지의 전부다.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기 위한 선전이 아니라 사회의 양심적인 세력에 호소하기 위해 그들은 투쟁한다. 그래서 언제나 연대가 그들의 사업이고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 그들의 기치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던 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오늘 이 나라 노동운동의 모든 정파조직과 노동자조직 대표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관료주의, 출세주의에 찌든 노조조직 대표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노동자조직 대표들을 포함하여 모든 노조간부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의 실패가 지금 우리의 노동운동을 망쳤다. 당신의 언어가 지금 우리의 노동운동을 망치고 있다. 언어는 노동자의 분노가 담겨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정서는 언어에 그대로 스며든다. 지금 우리는 노동자 일반의 분노를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의 분노가 노동운동의 언어로 조직되고 있지 못하다. 지금 노동운동의 언어로는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은 분노할 수 없다. 노동자 일반의 분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분노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분노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것을 표출해야 하는지 노동자들이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표제에서는 대표가 노동자들에게 그 분노를 명확히 선전해야 한다. 사업장의 특정한 현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일반적 문제가 분노로서 선전되어야 한다. 그것은 노동자의 언어로서 말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노동자의 언어로 표현되는 노동자의 분노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로서 말하고 노동자로서 분노할 수 있도록, 노동자이면 당연한 분노를 선전하고 조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언제나 열악한 노동자의 처지 개선을 호소하기 위한 운동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얼마나 그 노동자의 처지가 열악한 지를 비교분석해서 호소하는 보도자료와 기자회견, 그리고 대시민선전전이 주된 투쟁의 수단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노동자는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운동은 한발 나아갈 수 있다. 시민여론과 정당 등을 상대로 한 호소가 먹혀 투쟁의 요구가 관철되었다고 해서 노동운동이 전진한 것은 아니다.

4. 양심을 가진 자에겐 노동운동이 양심을 찾는 운동일 수도 있다. 정의에 집착하는 자에겐 노동운동이 정의를 위한 운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에겐 노동운동이 양심과 정의를 위한 운동이 아니다. 자신의 노동이 상품으로 거래될 수밖에 없고 노동의 수행을 지배당하며 노동의 결과를 빼앗기는 자에겐 자신의 언어로 양심과 정의를 말할 수는 없다.
 
지배받고 빼앗기는 노동이 지배당하지 않고 빼앗기지 않는 노동이 될 수 있도록 노동운동은 전개돼야 하고 노동자의 언어로 분노해야 한다. 노동자가 노동자의 언어가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 듣기 싫고 보기 싫고 지겨울 수 있도록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분노를 선전하고 조직해야 한다. 노동자의 분노, 정서가 노동자의 언어에 스며들 때 노동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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