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호주 의회에서는 ‘허점을 막는 법(Closing Loopholes Act)’이라는 별칭을 가진 공정노동법 개정안이 통과했다. 공정노동위원회를 통해 노동법의 울타리 바깥에 있던 플랫폼 노동자와 도로 운송노동자의 노동 기준을 설정하고 이들의 발언권을 보장하는 제도적 토대를 마련했다. 노동법의 허점을 보완하고자 한 개정안의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온다.우리 사회에도 노동법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는 영역이 다수 존재한다. 20세기 초 대량 생산 체제 속 노동자를 원형으로 하는 현재의 노동법이 노동세계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
사람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간다.아이는 부모에게 의존하고, 부부는 서로에게 의존하며, 부모도 노인이 되면 그 자식에게 의존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의존을 최소화한 채 홀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도 어린 시절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왔을 것이고, 나이가 들면 또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할 것이며, 이미 그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세상이라지만,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서로 도우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누군가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필연이라면
산업재해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가 사업주의 동의를 받아야 산재보상 신청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신청’을 넘어 업무상 질병에 대한 ‘판단’을 사업주가 결정하는 제도가 2024년에도 존재하고 있다. 병역의무의 일환으로 사회서비스 분야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회복무요원들의 이야기이다.‘복무기관의 장’이 ‘공상 및 공무상 질병’ 판단사회복무요원은 지정된 복무기관으로 출퇴근하며, 소속기관장의 지휘·감독을 받는다(병역법 31조4항). 또한 복무기관의 장은 경고처분이 가능하므로 징계권을 행사하는 사업주로 보더라도 손색이 없
나는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자’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울노동권익센터에 입사했다. 그러나 입사 이후에서야 내가 사실상 ‘기간제 근로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서울시 민간위탁기관으로, 3년에 한 번씩 수탁업체를 서울시가 심사하는데, 수탁업체가 변경되면 기존 업체와의 근로계약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설사 바뀐 업체로 고용승계가 된다고 하더라도, 근로계약의 상대방이 바뀌는 과정에서 어떤 혼란이 야기되는지 직접 겪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2024년 1월1일부로 서울노동권익센터 운영사업의 수탁기관이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
“그 사업장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 적용되는 곳이 아닌가요?”지난해 여름 한 근로자위원이 중앙노동위원회 부당해고 구제 재심신청 사건에 출석한 사용자측에 한 질문이다.기간제법은 기본적으로 5명 이상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된다. 5명 미만 사업장 쟁점이 있는 사건도 아니었는데, 왜 이런 질문이 나왔을까?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사업장에서 기간제로 고용돼 근로를 제공한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은 2022년 12월31일 사용자에게 기간제 근로계악 만료를 통보받기 전 2020년 7월1일
실업급여를 두고 말이 많다.지난해 7월 정부와 국민의힘은 ‘실업급여 제도개선 공청회’를 열어 한국은 실업급여 하한액이 높고 지급요건이 관대하다며 부정수급을 특별점검하고 하한액 폐지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박대출 국민의힘 의원은 실업급여가 악용돼 달콤한 보너스처럼 쓰이면 안 된다며 “시럽급여”라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현실에 “시럽급여”는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이들이 논의한 실업급여 역시 한국에는 없는 제도다. 구직급여가 있을 뿐이다. 공청회 이후 정부는 노동개혁을 한다며 구직급여 제도를 만지작거린다. 이미 국회에 구
누구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빌려 쓸 때는 조심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회사의 업무용 컴퓨터는 한동안 나만 사용하다 보니 ‘내 물건’이라고 인식하기 쉽다. 그래서 업무용 컴퓨터로 친구들과 편하게 얘기하고 개인용 자료를 내려받기도 한다. 그러나 업무용 컴퓨터는 회사 물건이다. 회사가 사서 구입하고, 사업장에 보관돼 있다. 무엇보다 내가 자리를 옮기거나 회사를 나가도 컴퓨터는 남는다. 최근 담당했던 사건들에서 연달아 사용자가 징계 혐의가 있는 노동자의 업무용 컴퓨터를 포렌식해서 증거자료를 확보하고자 했다. 노동자들은 개인적인 자료는 다 지
친한 동기의 퇴사를 축하하며 술 한 잔 기울이던 어느 저녁,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열었다가 보게 된 부고 메시지. 나도 모르게 ‘헉’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놀란 나를 보며 동기들은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고, 나는 그들에게 대답했다.‘김민아 노무사님 돌아가셨대…’처음 노무사님을 뵀던 게 언제였을까?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나의 기억으로는 2017~2018년쯤 국회 토론회다. 노무사님은 토론회 참석자들에게 책자를 나눠주고 계셨는데, 많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서 어딘지 모르
건설노조와 언론노조 그리고 여러 무수한 현장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대리하고 2018년 노동교육센터 ‘늘봄’을 설립해 노동교육 활동에 헌신해 온 김민아 공인노무사. 노동인권실현을위한노무사모임(노노모) 전 사무국장인 김민아 노무사가 지난 12월7일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12월9일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도식이 있었고, 12월10일 고양의 일산공감수목장에서 마지막 작별을 고했습니다.맑고, 밝은 목소리에 누구에게나 에너지를 주는 작은 거인, 김민아 노무사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자살사망자는 1만2천906명으로 전년보다 3.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이후 5년 만에 최저치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연령표준화 자살률(OECD 표준인구 10만명당)을 비교하면 한국은 22.6명으로 여전히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OECD 평균 자살률 10.6명의 두 배가 넘는다.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자살사망자는 1만2천727명이다. 경찰청 통계는 경찰의 변사사건 조사에 따른 것으로 군인 자살은 제외돼 통계청 자료와 차이가 난다. 경찰조사 결과에 따
바야흐로 K컬처 전성시대이다. 국내·외 다양한 기관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교원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저임금과 고용불안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183개 대학 부속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일하는 한국어 교원 3천302명 (2021년 10월1일 기준)의 노동실태는 매우 심각하다. 올해 국정감사에서 류호정 정의당 의원실이 교육부를 통해 국·공립대 26곳에 대한 ‘한국어 교원 현황, 근로기준법 적용 여부, 4대 보험 납입 여부’를 묻고 ‘계약서’ 내용을 모두 받아 검토한 결과 한국어 교원의 노동권이 얼마나
필자가 요양보호사 상담을 했을 때 일이다. 요양보호사가 이전에 맡았던 어르신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성희롱 발언을 매일같이 했다. 처음에는 참아도 봤지만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센터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센터장은 “그 어르신은 원래 그런 분이라 어쩔 수 없으니 요양보호사가 적당히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시간이 갈수록 어르신의 성희롱은 더욱 심해져 결국 해당 센터를 그만뒀다.그는 그 일로 충격을 받았지만 다른 어르신을 담당하면서 요양보호사 일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모르는 번호로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았다. 자신에게
‘굳이 사회나 공동체 걱정은 하고 싶지도 않아.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걸.’ 이따금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또래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듣게 되는 말들이다. 2023년을 살고 있는 청년 입장에서 미래에 대한 별다른 기대를 안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학창 시절 내내 경쟁하고, 취업하느라 경쟁하고, 직장에서도 경쟁하느라 지쳤다. 이 나라에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먹고사느라, 내 몸 하나 쉴 집 하나 챙기기 바쁘다. 사회에 대한 걱정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사회공동체에 관한 논의는 ‘먹고살기즘’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문제 해
단풍이 물들어 가는 늦가을, 조만간 단풍이 지듯이 이 계절 또한 지나가리라.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을 나오면 길가에는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주말인데도 정동길은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러한 서울의 중심 한가운데를 산책을 하며 즐겁고 여유로운 상념에 잠기고자 하나, 이미 내 머릿속은 다른 상념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중심지이지만, 내 일터이기도 하기에 그렇다.법은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대체로 아니라고 답변할 것이다. 그렇지만 법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정의의 실현일 것이다. 이러한 법을 만
나는 노동과 관련된 콘텐츠를 영상으로 제작해 공유하고 있는데 단연 압도적인 조회수를 기록하는 주제는 바로 ‘권고사직’이다. 127개의 영상 중 권고사직과 관련된 3개의 영상이 차지하는 조회 비중은 18.3%(3만 건)에 달했다. 대단한 통계는 아니겠지만, 권고사직을 겪는 노동자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만연화된 현상이라 조심스럽게 해석해 본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내 주변에서도 다르지 않았다.얼마 전 친한 동생 A에게서 급한 연락을 받았다. 동생은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이탈리아의 제과 브랜드를 국내에 유통하는 업체에서 일한다. 팀
일하는 부산 시민을 만나다 보면 종종 “부산이니까”라는 말을 듣게 된다.“부산이니까 서울보다 일자리가 적죠” “부산이니까 이 업계에서 한번 미운털이 박히면 더 이상 일 못 해요” “부산이니까 근로조건이 안 좋은 부분은 감수해야죠” “부산이니까 처음 일하는 사람은 낮은 임금을 받아요” “부산이니까 보수적이고 가족적인 조직 분위기를 가지고 있죠” 등 듣다 보면 그야말로 “부산이니까” 외면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생각해 보면 나도 이런 이유를 대고 한동안 부산을 떠났던 것 같다. 서울에 있다가 부산에 왔다고 하면 종종 “계속 서울에 있
은행의 콜센터 용역을 맡은 회사가 바뀌었다. 은행에서 올린 입찰공고에는 입찰에 참여하는 회사들은 제안서에 고용승계 방안을 마련하라고 규정해 상담사들은 고용이 승계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일부 상담사는 고용이 거절됐다. 고용이 거절된 이들은 다른 동료들을 위해 은행의 부당한 지시 등에 이의를 제기했던 노동자들이었다. 고용 거절에 대해 은행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은행은 기존 용역회사와 새로운 용역회사가 고용을 거절한 것이라며 본인들의 책임은 없다고 발뺌했다. 지방노동위원회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지만 고용승계에 대한 기대가 없다며 기각됐다.
2019년 처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나에게 주어진 한 대의 전화기는 나의 전부였다. 전화기 너머의 수많은 ‘나’들은 주로 직장내 성희롱 피해자의 괴로움을 이야기했지만, 때때로 인생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하기도, 언젠가는 세상에 대한 원망을 쏟아내기도 하면서 나는 그들과 함께 성장했다. 이렇게 수많은 목소리와 나의 마음이 만나는 이곳은 고용평등상담실이다. 물론 그 수많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힘든 일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때도 있었다. 피해자를 원망하던 날들이 있었고, 그 안에서 자책
지난 7월 서울의 서이초등학교에서 사회초년생의 신입 교사가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신입 교사의 죽음은 ‘교권 붕괴’‘공교육의 죽음’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심각한 교권 침해 실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사회적 참사로, 많은 국민들이 비통하고 애통해한 사건이다.그런데 8월 말경 “9월4일 교육부의 징계 예고에 대한 학생, 학부모, 일반시민의 의견 수렴”이라는 설문조사를 통해, 교육부가 9월4일 서이초 신입 교사의 49제에 참석하기 위해 연가·병가를 사용하는 교사들을 해임·징계하겠다 발표한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 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 같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온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을 우리는 ‘투사’라고 부른다. 이들 대부분은 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기보다,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그렇게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우리는 주로 싸움의 ‘결과’에 주목하기 때문에, 시작한 ‘이유’는 잘 모른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지금부터는 역사 속의 거창한 인물은 아니지만, 평범했던 어느 직장의 한 노동자가 투사가 돼 약 2년간 싸워온 사건을 소개하려 한다. 투사라는 단어가 투박하게 들릴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