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동네 오락실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 했던 게임 중에 스트리트파이터라는 대전격투 게임이 유명했다. 틈틈이 실력을 쌓았더니 끝판을 깨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옆자리 앉아 대전을 신청한 사람과의 결투가 다만 쉽지 않았다. 컴퓨터야 그 패턴이 뻔했는데,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주머니 속 마지막 100원이었으니 질 수 없는 승부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눈치게임이 치열했다. 뒤에서 지켜보며 바둑 훈수 두듯 참견하던 사람들도 숨죽였다. 필살의 일격이 먹혔고, 유 윈! 승리했다. 흰색 도복 차림 캐릭터가 당당한 자세로 기와지붕
택지개발 업체에서 6년여 일했던 한 ‘말단 직원’이 50억원의 퇴직금을 받았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놀랐다. 국회에서 일하는 그의 아비는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서둘러 대응한다. 화살 돌려 다툰다. 그 당당한 모습에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다. 얼굴에 두툼한 철판과, 자연스런 연기력은 그곳 일부 무리의 필수 자격 요건이라는 농담이 오래도록 흥했다. 선거철 표 앞에 허리 굽던 정치인의 변신은, 인류 진화 과정을 그린 표만큼이나 극적이었다. 공약은 물 빠져 흐릿해 갔다. 변명이 또렷했다. 억 소리 나는 특혜 의혹이 가을 하늘 뭉게구름처럼
띄엄띄엄 벽에 붙어 선 사람들이 그 앞 길어질 것이 뻔한 기자회견에서 자기 순서를 기다린다. 굵고 짧은 발언을 주문하는 사회자의 요청도 따로 없었으니 마이크 쥔 사람은 할 말이 하염없고 막힘없다. 술술 쏟아진다. 해고의 부당함과 책임 있는 자들의 무책임과 헛된 약속을 읊는 일이 두세 번째도 아닐 테니, 미리 준비한 원고 같은 게 필요하지 않았다. 해고 생활이 길었다. 물 빠진 낡은 조끼엔 어느 참전용사의 훈장처럼 주렁주렁 배지가 많이 달렸다. 연대할 곳도, 기억할 것도 그간 많았다. 서는 곳마다 치열한 전선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전
가을볕 눈부신 아침, 같은 옷차림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역 에스컬레이터 상행 방향을 탄다. 그 앞 둥근 지붕 건물 앞에서 할 말이 많았다. 거기 경찰이 많았다. 횡단보도는 철제 폴리스라인에 막혔다. 눈에 잘 띄라고 골랐을 형광 티셔츠에 새긴 구호가, 조끼와 모자며 또 그 위에 묶어 둔 붉은 머리띠가 문제라고 막아선 경찰이 말했다. 집회 금지며 방역법 위반이라는 경고방송이 요란스러웠다. 그 일대 경찰버스가 줄줄이 많았다. 지나던 시민은 무슨 큰일이 난 모양인가 싶어 두리번거렸다. 실은 별일도 없어 거기 모인 사람들 띄엄띄엄 서서 현수막
민의의 전당 국회 정문 앞, 철제 폴리스라인이 이리저리 꼬여 미로 같은 길을 낸다. 어디 가는지를 묻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여러 번 거치면 네모난 공간에 이른다. 기자회견장소 간판이 달렸다. 그 자리 한 사람만 설 수 있어 일행은 철제 펜스 밖에서 서성인다. 회견을 청한 사람은 그 앞 많지 않은 기자 앞에서 저마다의 다급한 사정을 풀어내 보인다. 어쩌다 사람이 겹칠 땐, 그 앞 많이도 지켜선 경찰이 집회 금지를 경고한다. 마이크 주고받아 다음 주자가 이어 달린다. 현수막을 잡고 설 사람도 없어 새롭게 준비한 입식 선전판이 그 자리 휑
눈에 안 보이면 멀어진다. 기억은 시간을 이기지 못해 풍화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길에 나와 싸우는 사람들은 뭐라도 한다. 굶고 기고 소리 지르는 것 같은 일 말이다. 잊히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 농성천막이 있다. 거기 꿈적 않는 사람이 있다. 한때 굶고 땅을 기고 점거농성을 벌였던 그들은 오늘 낡은 천막 입구에 또 새로운 농성 날짜 팻말을 건다. 이날로 455일, 코로나 위기와 함께 시작된 싸움이 길다. 언젠가 구호 새겨 그 앞에 걸어 둔 일회용 방역마스크엔 매연이 덕지덕지 붙어 잿빛이다. 정년이 진작에 지
혼자 밥 먹는 걸 혼밥, 혼자 술 마시는 걸 혼술이라고 부른다. 1인 가구가 늘어난 데다 코로나19 위기 상황까지 겹쳐 흔한 말이 됐다. 혼행(홀로 떠나는 여행), 혼공(혼자 공연 관람) 등 곁가지가 자꾸 는다. 이뿐인가. 요즈음 나 홀로 기자회견이며 1인 시위가 잦다. 종종 1인 집회라는 표현도 등장하던데, 형용모순을 피할 길 없다. 주로는 동시다발을 앞에 붙여 그 의미를 강조한다. 혼견, 혼시라고 하면 되려나. 그 방식을 두고는 길에서 다툼이 잦다. 일행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며 더 멀리 이동할 것을 경찰이 요구하면, 괜한 방해
기자회견 자리에 더는 기자가 없다. 그러나 요즘 마이크 잡은 사람들은 어딜 보고 말해야 하는지를 잘 안다. 스마트폰에 적어 둔 메모를 보면서 틈틈이 앞자리 세워 둔 스마트폰 카메라를 향해 눈을 맞춘다. 홀로 서거나 앉은 채로 할 말을 마치면 다음 사람과 자리를 바꾼다. 모일 수는 없지만 말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어 사람들은 기어코 방법을 찾는다. 어디에선가 화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거기 채팅창에 투쟁, 투쟁, 투쟁, 구호를 적어 동참한다. 1인 릴레이 온라인 기자회견 풍경이다. 가상의 공간에 모여 현실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건 어
여름이면 넓은 잎 무성하게 호박이 잘도 자란다. 어디 붙들 것만 있으면 필사적으로 감고 오른다. 부들부들한 잎 따다 쪄 내고 강된장 올려 싸 먹으면 입맛 떨어진 여름철 밥 두 공기 뚝딱이다. 호박잎 쌈 파는 가게가 흔치 않던데 인터넷엔 그게 다 있다더라. 누가 줘서 맛있게 먹고는 문득 시골집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해 밭 한 귀퉁이 호박잎이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한 번 와야 먹지 않겠냐고, 택배 부치려니 요즘 날씨에 상할까 무섭다고, 엄마는 말했다. 가야지요. 코로나 좀 잠잠해지거든. 택배가 왔다. 고추와 마늘과
장맛비 잠시 멈춘 한여름, 청년 알바노동자가 얼음 모형 안에 들어 습한 더위를 견딘다. 코로나 시대에 얼어붙은 것이 수없다는데, 별 수도 없이 거기 갇힌 사람들 탄식이 영화 겨울왕국 속 얼어붙은 안나의 마지막 입김 같다. 얼음을 녹일 진정한 사랑 같은 건 동화 속 이야기였나. 마법 같은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주식과 코인 열풍이라면 좀 달랐을까, 큰 수익을 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내 얘기는 아니었다. 판타지다. 얼어붙은 처지가 변함없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북극의 빙하만이 잘도 녹아내렸다. 여름이면 사람들 줄을
사람 몸 어디고 다 중요하다지만, 그중에 꼽으라면 머리다. 학습하고 추론하고 지각하고 언어를 이해하는 등 핵심적인 능력이 거기서 비롯되기 때문일 테다. 헬멧과 안전모 따위로 꽁꽁 둘러싸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이유다. 시선이 닿지 않는 뒤통수가 특히 취약한 곳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뒤통수를 친다는 말은 배신의 관용구로 흔히 쓰인다. 사람의 머릿속 능력을 모방한 인공지능은 곧잘 빠르고 합리적인 답을 내어줄 것이란 믿음이 있다. 그렇지 않다고, 오히려 불합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플랫폼 업체의 인공지능 배차 시스템에 따랐더니 업무효
이라는 오래전 드라마에는 키트라고 하는 똘똘한 인공지능 자동차가 나오는데,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손목에 찬 무전기에 대고 “키트!” 하고 부르면 주인공이 있는 곳까지 스스로 달려오는 차를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먼 미래의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훌쩍 가까운 것만 같다. 비록 그 앞에 ‘반’자를 달고 있지만, 자율주행은 요즘 흔한 말이다. 인공지능은 온갖 것 앞에 그럴듯한 수식어로 붙는다. 로봇청소기 같은 것들이 특히 그렇다. 그것만 사면 집 청소를 비롯한 온갖 귀찮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란 꿈에 부풀곤
코로나 시대, 노동조합하면서 할 말 많은 사람들 설 자리가 유난히 비좁다. 기자회견이 그나마 숨 쉴 구멍이었으니, 아홉 명 너비 천을 찍어 대느라 현수막장수가 요즘 바쁘다. 돋보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한 기획자는 현수막 문구와 뒤편 쭉 들고 선 팻말로는 부족했던지, 이런저런 상징의식을 준비한다. 퍼포먼스라고 흔히 불린다. 매번 똑같아 보이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색다른 그림을 찾는 사진이며 영상기자들의 바람과도 맞아떨어진다. 한때 겨울이면 뭔가를 불태우고, 여름이면 얼음을 망치로 깨곤 했다. 대형 현수막을 찢는 일도 흔했다. 팻말 목에
오랜만에 세차했고,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흙먼지 잔뜩 머금은 빗방울 자국이 온 데 선명했다. 익숙한 일이었다. 하루걸러 먹구름이 짙었고, 장마철인 듯 비가 잦았다. 기온은 큰 폭으로 널뛰었다. 이게 다 기후위기 때문이냐고, 날씨가 대체 왜 이러냐고 투덜대던 사람들이 틈틈이 마스크를 고쳐 썼다. 김 서린 안경을 티셔츠 아랫단으로 쓱쓱 닦아 다시 썼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이 맑았다. 꽤 반가운 일이었다. 햇볕 따라 불쑥 찾아든 한여름 더위는 반갑지 않았다. 꼭꼭 챙겨 쓴 마스크는 바이러스와 미세먼지를 막았지만 흐르는 땀과 열기엔 속
어느 저녁 연장 가방 달그락거리며 집에 들어온 아빠 몸에선 시멘트 냄새가 났다. 발 구린내가 섞였다. 종종 술 냄새, 홍어 냄새가 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얼굴 벌건 아빠가 까칠한 턱으로 내 얼굴을 부볐다. 땀 냄새가 시큼했다. 싫다고 버둥거렸다. 그게 다 밥 냄새였다. 조경관리 노동자들이 초여름 땡볕 아래 연신 허리 굽힌다. 거름 포대 둘러매고 청와대 앞 너른 화단을 훑는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동작으로 거름을 흩뿌린다. 지극한 관심 덕에 잔디는, 또 거기 색색의 꽃과 온갖 풀이 쑥쑥 자란다. 구린내가 진동한다. 뒤편 가족상
천둥소리 크더니 아침부터 비가 요란스럽게 내렸다. 웬 비가 이렇게 자주 오냐며 출근길 사람들이 구시렁댔다. 벌써부터 장맛비 걱정이다. 바람까지 불어 제법 썰렁했다. 옷장 깊은 곳에 넣어 둔 도톰한 소재 옷을 다시 꺼내어 입고 나온 참이다. 가만 서면 춥고 움직이면 곧 덥다. 종잡을 수 없는 게 요즘 날씨다. 행진 나선 해고자들은 출발지점에서 부지런히 비옷부터 챙겨 입었는데 안으로는 노조 조끼, 밖으로는 구호 새긴 몸자보까지 껴입었으니 곧 더울 것을 잘 안다. 가만히 있으면 잊힐 것을 또한 잘 알아 언젠가 한 달여를 굶고, 바닥을 기
집회와 토론회, 대의원대회며 크고 작은 온갖 회의까지 만날 일이 참 많은데 어쩌나. 사람들은 비대면 시대를 사느라 모니터 앞에 자주 선다. 클릭 몇 번이면 저 멀리 반도의 끝에, 또 지구 반대편 사는 누군가와 실시간으로 연결된다던데, 그 모든 편리한 기술이라는 게 나한테는 먼일이었는지 껌뻑껌뻑 먹통 화면만을 바라볼 일이 잦다. 컴퓨터 좀 만진다는 척척박사 능력자들이 어디에든 한 명쯤은 있어 앞자리 나서 보는데, 이게 또 뚝딱 풀리질 않는다. 화면이 나오면 소리가 문제, 소리가 됐다 싶으면 또 뭐가 말썽이라, 토론회 시작도 전에 해결
광화문광장에서 문화재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조선시대 육조거리의 흔적이라니 역사책에 선명한 내용이 눈앞이다. 안전모 쓴 작업자들이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흙을 파고 들어간다. 안전제일 새긴 가림막 너머로 지켜볼 수가 있다. 한때 촛불 든 시민과 태극기 휘날리던 노인이, 단결투쟁 머리띠 두른 노동자와 엄마 아빠 손 잡고 산책 나선 아이가 뛰고 걷고 앉았던 광장은 실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탑 같은 곳이었다. 그러니 지금 누구나가 무수한 죽음을 딛고 산다. 오늘 또 누군가 죽어 먼 길 떠날 테지만, 밥 벌러 나선 사람이 300킬로그램 철판
코로나 시대에도 할 말은 차고 넘쳐 기자회견이 잦다. 여럿이 모여 큰 목소리 내는 집회는 언감생심, 그러니 그 자리 현수막과 마이크, 스피커가 ‘열일’을 한다. 배터리를 탑재한 무선 마이크 시스템이 전기 끌어오는 노력과 발전기 소음이며 엉킨 선 푸는 고생 따위를 없앴으니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크기도 작고 소리가 우렁찼다. 그 손잡이에 단결투쟁 머리띠를 감을 만했다. 노조마다 하나씩, 필수품 자리를 꿰찼다. 기술의 발전은 분명 편리함을 가져왔다. 그러나 쉽게 해결하기 힘든 온갖 골칫거리도 함께 왔으니 마냥 좋지만은 않다. 기자회견 옆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 기노진씨가 29일 오후 건강 악화로 병원으로 후송되고 있다. 단식농성 17일 만이다. 해고자 김정남씨가 천막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30일 정년을 맞는 김씨는 단식농성을 이어간다. “착잡하다”고 정년을 맞는 소감을 남겼다.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판정에도 복직 이행이 기약 없다. 거리 농성이 이날로 350일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