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꺼림직하게 떠올리는 사건이 있다. 수년 전 서울지하철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폐암 발병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해요인으로 지목된 라돈을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정부는 역학조사 등을 통해 지하공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라돈으로 인한 건강장해가 발생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당시 환경부는 노동자들이 업무를 수행하는 지하공간은 작업환경이기 때문에 고용노동부 소관이라고 하고 노동부는 실내공기질 관리는 환경부 업무라면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에서 확
해가 바뀌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제시한 6대 국정 목표 중 4번째로 미래를 이야기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세계사적 대전환의 시대’에 ‘글로벌 선도국가로의 도약을 목표’로 담대한 미래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의 담대한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대통령도 고용노동부 장관도 입에 달고 살던 ‘4차 산업혁명’의 총아로 새해 벽두부터 화제가 된 챗지피티(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가 떠올랐다. 대화창에 “장시간 노동과 중대재해 간의 관련성(realtionship
연말 연초 각종 사건·사고, 그로 인해 갑작스레 생을 달리한 이들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최근 공중이용 시설에서 발생한 2건의 사건이 필자의 눈에 띄었다.첫 번째는 지난달 29일 일어난 제2경인고속도로 방음터널 화재참사였다. 이 사고로 5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4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방음터널을 지나던 5톤 폐기물 운반용 트럭에서 불이 나 총길이 830미터의 방음터널 중 600미터 구간이 불에 타 대형참사로 이어졌다. 사고 조사과정에서 ‘터널 진입 차단시설’의 정상 작동 여부, 값싼 가연성 소재 사용과 민자도로 관리 부실
이제 2022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30명 미만 사업장에 대한 8시간 추가연장노동이 허용되는 시간도 딱 그만큼 남아 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이 시간을 연장시키겠다며 몽니를 부리고 있다. 애당초 소규모 사업장에 대한 유예기간이 끝나는 문제였던 것이 갑자기 ‘일몰제’라는 딱지가 붙어 화물노동자들의 ‘안전운임제 일몰제’와 같이 여야의 협상테이블에 오른 기가 막힌 상황이다.남은 시간 동안 여야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모르겠으나,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대로 유예기간이 연장되지 않으면, 계도기간을 연장하면 그만’이라는 고용노동부의
“최근 정부가 발표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이나 거기서 중요하게 언급하는 영국의 로벤스보고서에서도 말하고 있듯, 기업을 규제하고 처벌하기보다 자율과 예방으로 안전보건관리의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 판결에 있어서도 이 점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2018년 12월10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컨베이어벨트 점검 중 사망한 하청노동자 김용균님 사건 관련 형사재판에서 원청인 서부발전측 변호인이 항소심 최후변론에서 한 말이다. 영국의 로벤스보고서를 근거로 삼아, 한 청년의 생을 영영 빼앗은 안전보건범죄의 책임을 덜어보려는 취
최근 정부의 노동시장 개혁안을 마련해 온 전문가 논의기구인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에서 연장근로시간 관리단위를 노사 간 자율 합의를 통해 주,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정할 수 있는 내용의 ‘노동시장 개혁 최종 권고문’을 발표했다. 현재 체제에서 연장근로시간은 1주 단위로 관리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연장근로시간이 1주 12시간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주 52시간 상한제를 운영 중에 있다. 만약 정부가 해당 권고안을 받아들여 제도가 정비된다면, 연장근로시간을 포함한 주 최대 근로시간이 69시간까지 허용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노동계와
2022년 6월23일 윤석열 정부의 신임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 브리핑을 진행했다. 기자들을 모아 놓고 1시간 넘게 브리핑과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우선 추진과제로 근로시간 제도 및 임금체계 개편을 이야기했고, 추가 개혁과제로 노동법 사각지대 해소, 산업전환에 따른 원활한 이·전직 지원, 양극화 완화 등을 노사정·전문가와 사회적 대화, 충분한 논의과정을 거쳐서 추진하겠다고 했다. 근로시간 제도는 노사 자율을 빌미로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를 ‘주’에서 ‘월 단위’로 늘리고 근로시간 저축계좌제 도입, 선택적 근로시간
오늘날 안전보건을 시대적으로 구분한다면 첫 번째 시대는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된 1981년이며 두 번째 시대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올해 1월27일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중대재해처벌법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기업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주체로 인식됐던 경영책임자가 근로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 증진시켜야 할 주체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법이기 때문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산업안전보건법 사각에 있던 경영책임자에게 직접 나서서 평상시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고용노동부가 지난달 30일 발표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은 타율적 규제가 실제로 산업현장에서 효과가 없었다는 전제에서 영국·독일 등의 선진국과 같이 자율적 규제를 통해 예방 관점에서 산업안전을 구축한다는 것을 큰 방향으로 하고 있다.중대재해 감축 추진 방향으로는, 위험성평가 강화와 근로자의 안전보건 참여 확대를 제시하고 있다. 위험성평가를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정기감독을 ‘위험성평가 점검’으로 전환하고, 중대재해 수사시에 기업이 위험성평가를 토대로 충분한 예방 노력을 헸는지를 참작 요인으로 반영하겠다는 계획이다.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3
군필 남성 대부분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군대에 다시 가는 악몽을 꾼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웃픈 이야기일 것이다. 고백하자면 현역병 생활을 한 적이 없는 나에게도 이와 비슷하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악몽이 있는데, 다름 아닌 컨베이어에서 일하면서 떠밀려가는 꿈이다. 컨베이어 속도에 맞춰서 일하다가 제시간에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해 내가 만들던 차량에 떠밀려가고, 겨우 수습하고 돌아서면 다음 차량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꿈속에서도 여전히 진땀 나고 불쾌하기 짝이 없다. 공장을 떠난 지 제법 되었건만, 10여년간 컨베이어 속도에 통제
안전보건경영시스템(KOSHA-MS) 인증제도는 안전보건 분야를 기업경영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켜 기업 스스로 자율적인 안전보건관리체제를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활동이다. 지난 20여년간 공공기관 주도의 유일한 안전보건인증 제도로서 기업의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과 재해예방 활동에 기준과 절차가 되는 규격으로 인식돼 왔다.안전보건경영시스템이란 안전보건을 관리(위험성 관리 등)해 경제적 효과(재해 손실비용의 감소)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 즉 기업의 경영성과를 위해서는 자율안전관리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체계의 구축 및 유지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가 지나, 어느덧 코로나가 익숙해진 일상을 살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업무를 수행하면서 코로나에 감염되고 있지만, 감염병의 특성상 명확한 입증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때문에 근로복지공단은 노동자가 업무 수행 중 코로나에 걸려 아프거나 사망한 경우 업무수행 과정 중 감염될 가능성 여부를 조사한 뒤, 업무 이외 사적활동에 의한 감염 가능성과 비교·평가를 통해 업무관련성을 인정한다.그렇다면 이미 업무상 재해임을 인정받은 산재노동자가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코로나에 감염된 경우, 이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할 수 있을까
거대한 반구의 솥, 코끼리도 담아낼 듯한 국통과 찜통, 삽과 가래와도 같은 조리도구를 다루며, 씻고 썰고 다지고 볶고 튀기는 노동! 끊임없이 찬 물과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불과 기름이 튄다. 그리고 층층이 쌓아 올려지거나 무너지는 스테인레스와 견고한 플라스틱 식기들이 내는 금속성 소음! 차분히 식판 위에 올라앉은 밥과 찬만을 마주하는 사람들은 짐작하지 못한다, 그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현장의 살풍경을. 20킬로그램이 넘는 쌀가마와 밀가루 포대를 들어 옮기고, 씻고 앉히고 반죽을 하고 튀김옷을 입히고, 조림이며 찬거리를 반구의 거대한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에 휩쓸리면서 우리 일상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멀어지게 했고, 소상공인을 필두로 국민의 경제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직도 감염자 수는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며 종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우리는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됐지만 사망사고는 오히려 늘어 노동자와 국민은 불안에 떨고 있다.설상가상으로 10월29일 한밤중에는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 한복판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서 사상 초유의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어쩌다
고용노동부는 2019년 8월8일 ‘법령 위반으로 발생한 사고의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을 만들어 근로복지공단에 시달했다. 공단은 그해 10월1일자로 같은 내용으로 지침을 전파했다. 당해 기준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의 법리를 몰각하고, 20만원 이하 벌금에 불과한 도로교통법 위반 사고를 산재보험에서 일률적으로 배제해 노동자의 생존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후 3년의 기간이 지난 이후 다수의 판결이 나오게 됐고 대부분 공단이 패소했다. 그중 확정된 공단 패소 14건의 판결과 공단 승소 1건의 판결을 살펴보고, 소
최근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보장’을 촉구하는 반가운 언론 사설을 접했다. 지난달 25일 “매일경제에 실린 근로자 스스로 안전 챙기는 ‘작업중지권’ 기업도 적극 장려해야”(22.10.25)라는 제목의 사설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의아했다. 경제지의 특성상(?)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논조를 담은 기사가 좀체 없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사설을 썼을까’라는 의구심도 잠시 있었지만, 해당 사설은 시종일관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주요 논지는 이렇다. 사업주·경영자를 형사처벌해
고용노동부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을 개정하겠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중대재해처벌법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시행령을 개정할지 아니면 완화하는 방식으로 개정할지 알 수 없다.경영계는 그동안 줄기차게 중대재해처벌법 2조(정의)9호와 관련 ‘경영책임자 등이란 사업을 대표하고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이에 준해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다’로 규정한 부분을 개정할 것을 요구해 왔다. 경영계의 요구사항은 같은 법 제2조 9호의 ‘이에 준하는 사람’을 시행령에 ‘법인의 정관, 이사회 의결을
처음엔 지독한 가짜뉴스라고 생각했다. 아니, 제발 그러기를 바랐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한 후에는 희생자의 숫자만이라도 오보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8년 전과 같은 오보는 없었다. 그날 TV에서 바다에 잠긴 배를 목도했던 순간은 그대로 복제돼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함으로 남았다. 세월호 이후의 대한민국은 달라야 한다던 다짐이 무색하게 우리는 다시 가족과 지인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일상의 안부가 아니라 정말로 ‘살아 있는지’ 물어야 했다. 그대들은 안전한지, 자녀들은 무사한지 물어야 했고, 걱정할 사람들을 위해 S
의료시설은 환자 식별과 관련해 오류의 여지가 거의 없어야 한다. 의료팀이 환자의 병력을 기반으로 적절한 치료를 제공할 수 있도록 100% 정확도로 식별돼야 한다. 그런데도 종종 환자 또는 환자기록물이 바뀌어 의료사고가 발생하고 있다.2006년 대전의 한 대학병원에서 환자 2명의 진료기록부가 바뀌어 위 절제 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갑상샘 제거 수술을 받고, 갑상샘 환자는 멀쩡한 위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는 대형 의료사고가 발생했다. 이는 마취 전 환자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는 등의 준수사항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일어난 사고다. 201
“사고 직후 그 설비를 모두 멈출 필요가 있었을까요?”중대재해로 사망한 노동자의 동료가 증인으로 나온 재판에서 어느 판사가 한 질문이었다. 검사와 변호인이 질문하는 내내 주눅 든 사람처럼 소극적으로 답변하던 동료 노동자의 목소리가 유일하게 높아졌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사람이 죽은 곳 아닙니까.”사고가 왜 발생했는지 조사하고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안전점검과 필요한 조치가 이행되기 전이었다. 심지어 참혹한 사고 현장이 채 수습되기도 전이었다. 노동자의 몸이 끼여 해당 설비가 멈추자, 회사는 혹시라도 생산에 지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