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호사님, 감사합니다.” 휴대폰에 문자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연차휴가였는데 판결 결과를 알아보러 사무실에 연락하려던 참이었다. 문자메시지를 읽고서 안도했다. 혹시나 했는데 다행이다. 1심 판결을 기다릴 때보다 더 긴장이 됐다. 사측이 1심에서 하지 않은 주장까지 추가해 다툰 터라 도대체가 타당하지 않다고 반박했지만 재판부가 제대로 인정할지 걱정이었다. 소송대리인인 내가 이랬으니 당사자들은 오죽했을까. 피고 사측 준비서면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나는 원고 대표 임○○에게 이러 저런 증거 자료를 수시로 요청했는데 그는 대표로서
“그 사업장은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 적용되는 곳이 아닌가요?”지난해 여름 한 근로자위원이 중앙노동위원회 부당해고 구제 재심신청 사건에 출석한 사용자측에 한 질문이다.기간제법은 기본적으로 5명 이상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된다. 5명 미만 사업장 쟁점이 있는 사건도 아니었는데, 왜 이런 질문이 나왔을까?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사업장에서 기간제로 고용돼 근로를 제공한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은 2022년 12월31일 사용자에게 기간제 근로계악 만료를 통보받기 전 2020년 7월1일
전설(legend)의 사전적 의미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요즘엔 어떤 일이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이나 성과를 냈을 경우 오랫동안 그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전설이라 부른다. 한국축구의 전설 차범근, 한국야구의 전설 선동렬, 한국영화의 전설 신성일 등이 대표적이다. 전설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싸움의 전설이다. 혼자 17명과 싸워서 이겼다는 내용이지만 ‘뻥(허풍)’이 다분하다.윤석열 정부에서도 전설이라고 부를 일이 생겼다. 물론 싸움은 아니다. 17명보다 280배 많은 4천829대 1의 전설이다. 경찰이 역대급 특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무리한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다가 채무상환을 하지 못하게 된 탓이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매우 화가 나고 가슴이 아팠다. 태영건설이 대주주로서 추진한 부동산 개발사업으로 마을과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에 있는 관지미 마을 주민들은 지난해에 살던 마을을 떠나야 했다. 태영건설이 ‘진천테크노폴리스’라는 산업단지를 추진하면서 마을이 통째로 산업단지 부지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민간기업이 추진하는 산업단지에도 토지강제수용권을 부여하고 있는
2012년 말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다. 노조 교육을 위해 자카르타를 방문했는데, 현지 여성간부가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 당선을 축하한다고 했다. 뭐가 축하할 일이냐 물으니, 여성 대통령이 돼 여성노동자를 위한 정책이 실현되는 것 아니냐며 기대를 표명했다. 여성이 대통령이라는 것과 여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것은 다른 문제라 말하니,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에 대한 실망인지, 박근혜에 대한 실망인지 잘 모르겠다.청년유니온이 생겼을 때다. 를 열독한 청년 노조간부가 청년유니온이 생겼으니, ‘꼰대’가 장악한
10년도 더 된 일이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간장을 사러 집 근처 할인마트에 갔다. 슈퍼에서 사는 것보다 저렴했다. 뿌듯한 마음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뛰듯 걸었다. 집에 다다를 때쯤 사지 않은 물품이 떠올랐다. 가격 차이가 크지 않다면 슈퍼에서 살 요량으로 집 앞 슈퍼에 들렀다. 역시나 비쌌다. 빈손으로 되돌아 나오자 주인이 나를 불러 세웠다. 비닐봉지 안에 든 간장을 꺼내 보라고 했다. 난생처음 도둑 누명을 썼다.당시 감정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짐작도 어려울 것이다. 결백했지만 ‘결백을 입증하지 못해서 도둑이 되면 어쩌지’
대설주의보로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지난 9일 부산과 대구를 하루에 찍고 돌아오는 빡빡한 출장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일환경건강센터가 얼마 전 국소배기장치를 교체해 준 영세 제조업체 두 곳이다. 새로 설치한 장비가 문제없이 작동하는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이날의 출장은 한 건의 공문으로부터 시작됐다. 두 달 전 ‘작업환경개선 지원사업 후보사업장 추천’이라는 제목의 공문이 센터에 접수됐다. 발신인은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 공단처럼 큰 기관이 우리같이 작은 센터에 무슨 볼일이지? 네 번째 사
* 이 글은 영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괴물은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래서 누군가를 괴물이라 규정하는 순간, 괴물로 명명된 존재는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세계에 발붙일 수 없게 된다. “괴물이 누구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은 영화 바깥에서, 즉 안전한 거리에서 ‘괴물 찾기’를 즐기던 관객을 기어코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 진짜 괴물이 누군지 따져 묻는 영화다. 이를 위해 영화는 등장인물 셋의 각기 다른 시점으로 사건을 풀어내는 독특한 3부 구성 형태를 취한다.1부의 싱글맘 사오리의 시점에서는 아들
신군부 정권의 성격신군부 정권은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공수부대를 국가폭력으로 동원, 광주시민을 희생양으로 삼아 5·18 살인극을 벌였다. 5·18 광주항쟁은 시위진압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과잉진압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신군부가 특정한 정치적 목적(정권찬탈)을 달성하기 위해 광주시민을 희생시킨 계획적인 살인극이었다.‘사람사냥’을 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이 광주시민들을 분노로 들끓게 했다.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에 애국가가 울려 퍼진 뒤 비무장 광주시민에게 헬기 기총사격을 가한 것은 무장시위대에 대한 자위권 차원
국가보훈부가 최근 이승만 전 대통령을 내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발표하자 언론의 반응은 엇갈렸다. 경향신문은 지난해 12월26일 4면에 “‘과(過)’도 있는데 … 이승만 추앙하는 윤 정부”라며 정부를 비판했고, 한국일보는 같은 날 8면에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이승만 논란”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 1면에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제 와서야 선정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승만이 진즉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야 했고 주장했다.이승만만큼 논란의 인물도 드물다. 조갑제는 자기 책 ‘고문과
갑진년 새해 첫 상담은 해고예고도 없이 잘린 어느 50대 노동자 이야기다. 노동자는 사업주를 고용노동지청에 신고했지만 노동지청은 아무 조치도 없이 사건을 끝냈다고 한다. 그는 분통을 터뜨리며 “해고예고 수당을 좀 받아 달라” 애원했다. 사건 종의 사유가 뭐냐 물었더니 “피진정인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서”라고 쓰여 있더란다.신병을 확보하고 사실관계를 조사해 피해 노동자의 권리를 구제해야 할 노동지청 근로감독관이 가해자가 어디 있는지 몰라 사건을 마무리하겠다니. 귀를 의심했다. 이처럼 상담소 문을 두드리는 임금체불 피해 노동자들은 하나
얼마 전까지 청년 활동가들끼리 글쓰기 계모임을 했다. 각자의 활동을 ‘글’이라는 언어로 쌓아가자는 취지였다. 보증금을 내고 글을 쓰지 않으면 벌금을 차감하는 방식으로 강제요인을 둬 꾸준히 글을 써 보고자 했다. 내가 참여한 이유는 글 쓰는 연습을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활동을 글이라는 언어로 정리해 나가는 게 왜 중요한지, 다른 참가자들의 글을 보면서 이 모임의 취지를 이해하게 됐다.동시에 우리 센터에서 매년 진행하는 비정규노동 수기공모전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됐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지난해에 13번째
나는 플랫폼 노동을 비롯해 변화하는 일하는 방식을 연구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일터의 특징 중 하나는 물리적인 공간과 보이지 않는 기술이 뒤얽혀 있고, 그 결과 일하는 방식과 규범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앱을 활용해 일하는 플랫폼 노동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앞으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칼럼의 첫 번째 글인 만큼 일터의 변화가 제기하는 몇 가지 주제를 소개하고자 한다.인공지능(AI)·로봇·알고리즘과 같은 기술이 일터에 도입되면서 ‘알고리즘은 새로운 보스인가’ ‘로봇은 새로운 동료인
지난달 28일 법무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제4차 외국인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을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2023년의 공식 업무가 끝나는 날을 하루 앞둔 발표였다. 외국인정책 기본계획은 정부의 외국인·이주민 정책의 원칙과 방향, 중장기 전략체계를 담는 ‘최상위 범정부 종합계획’이다. 재한외국인 처우 기본법(외국인처우법)에 따라 법무부 장관이 5년마다 수립하고,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기본계획에 대한 연도별 시행계획을 세우고 이행하도록 돼 있다.2008년 1차 기본계획을 수립한 이래,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3
“○○병원에서 22개월을 일했는데 퇴직금을 받지 못했어요.” 처음 시작은 퇴직금을 못 받았다는 거였다. 고용노동부에 임금체불 진정서를 작성하기 위해 일하는 환경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365 안심병동사업’에 따라 거제시 한 병원 간병서비스에 투입되는 노동자의 이야기다 .경상남도 서민의료복지 특수 시책사업이다. 하나의 병실에 4명의 간병인이 24시간 간병서비스를 제공한다. 간병비는 무료이거나 하루 1만원, 또는 2만원밖에 안 된다. 그런데 환자를 위해 일하는 간병인은 돈을 떼이고 있다.“우리 병원이 3
2024년 우리 산업과 경제지형도를 바꿀 가장 큰 동인을 지목하면 두 가지 후보가 유력할 것이다. 하나는 chat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급격한 부상으로 상징되는 디지털전환의 가속화다. 다른 하나는 점점 더 뚜렷해지는 기후위기와 생태위기에 대응해 산업과 경제를 생태적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다. 지금 세계는 디지털전환과 생태전환이라고 하는 이중전환(Twin Transformation)의 길목 앞에서 시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면서도 국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디지털전환은 거대 디지털 플랫폼 기업
결혼을 앞두고 불안감이 증폭된 시기가 있었다. 우연히 포털의 여성 사이트에 연애와 결혼 사연을 읽다 보니 혹 내 미래가 될까 싶어 두려웠다. 다행히(?) 현실 결혼생활은 다이내믹하기보다는 담담한 일상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여성들이 온라인으로 나누는 이야기가 실제 고민과 오락이 뒤섞였단 점을 알았다. 미디어까지 인용되는 사연은 ‘판춘문예’라 불릴 정도로 잘 짜인 서사구조와 ‘사이다’ 결말을 갖춰야 조회수도 많다. 요즘은 유튜브에 비슷한 사연만 모아 읽어 주는 채널도 적지 않다. 꾸며 낸 내용이라도 네이트판 등의 글은 시대를 알 수 있
1832년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목사로도 알려진 칼 귀츨라프(Karl Gützlaff)는 오랫동안 중국에 머물다가 태평천국운동이 벌어질 무렵 20년 만에 유럽 사회에 돌아왔을 때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조를 접하게 됐다. 이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그는 놀라서 외쳤다. “나는 그 유해한 교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가? 바로 이와 동일한 것이 중국에서 많은 폭도들에 의해 한동안 설교됐다!” 칼 마르크스는 이 일화를 그저 ‘양극단은 일치한다’는 변증법의 원리를 증명해 주는 사례로 넘겨 버렸지만, 이 문제는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역사
1. 응답자들은 ‘노란봉투법 부활’를 올해 가장 주목할 노동이슈로 뽑았다고 지난 2일 매일노동뉴스가 보도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달 노사정·전문가 100명에게 2024년 주목할 노동이슈와 인물에 관한 설문조사한 결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조와 3조에 관한 개정안, 일명 노란봉투법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아 1위를 기록했다. “사용자 범위를 확대하고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가압류를 일부 제한하는 내용의 노조법 개정안은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입법이 성사하지 않았지만 올해에도 노동현안으로 대두할 전망”이라며 밝히고
”나쁜 놈들 변호할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약 4년 전, 변호사가 회원 대다수인 노동법 공부모임에서 질의에 답변하던 강연자가 자신도 궁금한 게 있다며 그 자리에 있던 변호사들에게 한 질문이다.그날의 강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질문만큼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튀어나온 그 질문은 솔직하고 노골적이라서 신선했다. 한편으로는 “변호사가 분별력 없이 아무 사건이나 맡는 게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지적이라고도 느꼈다. 예상 외의 질문인지 청중들 사이에 약간의 당황과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고 대형로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