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성산동 야트막한 산 아래 동네 골목에 평상이 하나 있어 사람이 쉬어 간다. 이른 아침 골목청소 공공근로 나선 노인들이 노란색 조끼 입고 모여 앉아 두런두런. 어제 보고도 할 얘기가 태산이다. 폐지 줍던 노인이 구루마 잠시 세워 두고 거기 앉아 숨을 고른다. 땀을 닦는다. 수업 마친 아이들이 집에 가다 말고 맨발로 올라 우당탕 뛰고 논다. 방과후
우리의 일은 음악입니다. 어렵지도 않은 뻔한 말을 새긴 현수막 앞에서 가수 연영석이 노래한다. 노조할 권리 보장 구호 높았던 129주년 세계노동절 대회 무대 옆이다. 사진이, 또 기록이 나의 일이었으니 찍었다. 아는 가수의 아는 노래를 들어 볼까 싶어 대형 음원사이트 여러 곳을 뒤졌는데 모르는 노래 한두 곡을 찾는 데 그쳤다. 바닥에 펼쳐 둔 기타 가방에
출근길 지옥철 국회선, 꽉꽉 들어찬 복도에서 꽥꽥 고성이 오갔다. 출입문이 끝내 열리지 않아 사람들은 출근하지 못했다. 살아는 있되 꼼짝을 못해 식물국회라고, 몸싸움만 끝없어 동물국회라고도 불렸다. 종종 난장판, 개판이라고도 했다. 학생들은 견학을 왔다. 로텐더홀에서 국회 역사에 대해 들었고, 기념촬영을 했다. 국회의원님 안녕하세요, 개중에 넉살 좋은 학생
봄꽃 떨어진 자리에 새잎이 돋는다. 쑥쑥 자란다. 다 말라 죽은 듯 갈색빛 황량한 풀섶에도 가만 보니 초록 새싹이 쑥쑥 오른다. 늙어 허리 굽은 할매가 쑥을 뜯는다. 봄볕 아린 날이니 모자가 깊었다. 때때로 바람 차 소매가 길었다. 할매는 오래도록 봄이면 쑥을 뜯었다. 쑥국을 끓이고 쑥떡을 빚어 어린 자식 밥상을 차렸다. 쑥쑥 자라 이제는 엄마 따라 늙은
둥글게 말린 컨베이어벨트에 탄가루 잔뜩 앉았다. 손바닥 자국이 찌글찌글 남았다. 사고 현장이다.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회사 사람은 강조했고 들어가기도 힘든 곳이라고, 몸 굽혀 현장 살피던 조사위원은 말했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함께 일했던 동료가 사지에서 증언했다. 그의 안전모엔 이제 멀끔한 헤드랜턴이 붙어 밝았다. 어두운 밤, 굉음을 내며 돌
여기저기 꽃피어 봄이라는데, 요란한 찬바람에 눈발이 날려 사람들은 돈 들여 세탁해 옷장 깊숙이 넣어 둔 겨울 점퍼를 다시 꺼내 입는다. 봄이 멀었다는 사람들이 길에 많다. 언젠가의 날 선 구호가 어느덧 정부가 내건 현수막에 들었지만 걱정 깊어 사람들은 당연한 얘길 하느라 길에서 목이 쉰다. 꽃샘추위가 어김없다. 바람 거세다. 그늘진 곳 뿌리내린 나무가 꽃망
단식 열흘째, 재춘씨가 웃는다. 친구 혹은 동지 또는 투쟁 선배 행란씨가 찾아왔는데 좁은 천막이 시끌벅적하다. 진작에 온 줄을 알았다고. 굶는 사람 앞에서 죽는 얘길 할 수도 없어 행란씨는 사는 얘기를 죽 풀어낸다. 그게 다 먹는 얘기다. 녹색병원 앞 분식집 순대부터 또 어디 맛나던 요리까지. 기어이 그 앞에 빵 두 봉지를 풀고 먹는다. 쫄깃한 게 이 빵
봄기운 스멀스멀 오르는데, 놀이터와 동네 길에서 재잘재잘 떠들며 뛰는 아이들을 볼 수 없어 온 세상이 적막했다. 새 학기 맞은 어린이집에선 나가 놀지 못해 답답한 아이들이 요란스레 뛰다 혼이 났다. 공기청정기가 돌고 돌았다. 아이 마스크를 깜박한 아빠는 집을 오가느라 회사에 지각했다. 끼어들던 차와 양보란 없는 차량이 다투느라 경적이 길에 요란했다. 치열한
노숙과 단식농성, 오체투지가 이어지는데 그 어느 하나 새로울 것이라곤 없어 공무원 해고자들은 척척 해낸다. 농성계의 ‘고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노상 추위를 어쩌지는 못해 앉으나 서나 침낭 차림이다. 석순처럼, 또 고인돌처럼 우뚝 섰다. 커다란 돌덩이 어깨에 나눠 지고 해고자들은 길에 산다. 찬바람 길, 침낭 밖은 위험했다. 주머니 구석구석 핫팩을 품
서울 강서구 등촌동 그늘진 골목이 바람길이라 거기 덩그러니 웅크린 천막이 울었다. 현수막이 널을 뛰고 손팻말이 날았다. 미세먼지 가신 하늘이 쨍했다. 해 들지 않는 천막에서 기타 소리가 울렸다. 노래가 따랐다.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4천390일, 과연 그들의 해고 이야기는 끝을 몰라 티도 나지 않는 끝자리를 하나 더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김정욱씨가 경찰청 앞에 섰다. 작업복 차림인데, 이제 복직 한 달째니 빳빳한 새것이다. 등에 붙은 반사 필름이 각도에 따라 반짝거렸다. 노동자 안전을 위해 고안된 것인데, 어두운 곳에서 눈에 띈다. 작업복의 상징이다. 요즈음 멋쟁이들 패션 아이템으로도 번졌다. 공장에서든 거리에서든 사람을 잘 보고 살피란 뜻일 테다. 사람이 먼저라
머리 허연 노인이 새카맣게 어린 모습 영정 앞에서 이제는 늙어 고장 난 몸을 힘겹게 접었다. 영정을 똑바로 보지 못하던 엄마가 부축했다. 용균아 절 받아라, 호통치듯 외치던 그의 눈이 붉었다. 주름 깊었다. 꽃다운 청춘이었다고 빈소 찾은 사람들이 포스트잇에 적었다. 스물넷 청년의 노동과 목숨을 연료 삼아 발전소는 돈다고 회견 자리 원로는 말했다. 컨베이어벨
길에서 팻말 든 사람들은 장갑 없이 맨손이다. 할 말이 끓어넘쳐 손이 붉다. 종종 떨린다. 손끝 아린 겨울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또 누구나의 봄을 기다린다. 자식 잃은 엄마는 딸아이 앞세운 백발의 아빠를 만나 손 맞잡았다. 비로소 엷게 웃었다. 딸아이 휠체어 밀던 엄마를 만나 부둥켜안았고, 부르튼 입술 걱정을 나눴다. 앞서 세월을 견딘 노란색 점퍼
가방에선 양말과 속옷, 세면도구와 보조배터리 따위가 나와 여느 여행 가방과 다르지 않았다. 노조 조끼와 깔판이며 핫팩과 높은 산에서나 쓸 법한 두툼한 장갑이 딸려 나와 조금 달랐다. 청와대 앞길 비닐집에 사는 이재열 공무원노조 서울본부 부본부장의 짐이다. 농성장에 널린 가방 중에 가장 말끔한 것이었다. 여행용으로 산 것인데 농성용으로 쓴다고 했다. 농성장 당번이 돌아와 짐 꾸릴 때마다 해고자 처지를 깨닫는다고. 다시 여행용 가방으로 쓰고 싶다며 웃었다. 옆자리 누구나가 예상했던 것들이 거기 들었다. 길바닥 생활 오랜 사람들은 남의
어느 무명의 묘비처럼 영정은 그림과 이름 없이 빛났다. 하늘과 거기 흐르던 구름을 네모 틀에 품었다. 종종 그 앞에 선 사람들 온갖 꼴을 담았다. 거울이었다. 겨울, 국화가 얼었고 사람들은 울었다. 한 무리의 노동자들 팻말 들어 꼭 영정 같은 모습으로 그 앞에 줄줄이 섰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거울에 비쳤다. 거기 영정에 누가 들어도 놀라울 것 없었다고, 사
겨울, 눈이 내리고 사람은 오른다. 바람 잘 날 없어 현수막이 운다. 아랫자리 지켜 선 사람들은 목 꺾어 바라보다 몰래 운다. 목재 화물운반대 땔감 삼아 피운 불에 언 몸을 녹인다. 아지랑이 타고 재가 오른다. 줄 따라 보조 배터리가 오르고 빈 것이 내려온다. 두 번째 겨울, 기온은 낮고 사람은 저만치 높다. 연기 오르지 않는 굴뚝을 향해 땅바닥을 기어간
사람 웃기기는 쉬워도 울리기는 어렵다고, 오래전 마당극 만들면서 배웠다. 상황을 비트는 말 한마디로, 넘어지고 부딪히는 과장된 몸짓으로도 웃음은 터졌다. 그러나 눈물은 슬픈 감정을 땔감 삼아 물 데우는 일이었다. 열기가 차곡차곡 쌓이다 어느 순간 왈칵 끓어넘친다. 쉽지 않아 속이 끓었다. 웃는 사람 사진 찍기는 수월해도 우는 사람 담기가 난감하다. 카메라
온갖 거짓과 꼼수와 잘못을 따져 묻는 일은 종종 적을 이롭게 하는 일로 비친다. 흠집 내기,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노동조합총연맹이 파업으로 정권의 거짓말을 규탄했다. 보수언론은 명분 없는 뻥파업이라고 흠집 낸다. 정치권이 여야 없이 거든다. 정권의 열혈 지지자 일부가 댓글 달아 함께한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데, 난데없는 동지애가 이 겨울에
언젠가 엄마가 영화표를 한 장 줬다. 노동조합에서 나온 거라고 했다. 어느 공장 식당에서 밥 짓는 일 했던 엄마는 으레 그 회사 직원이었고, 노조 조합원이었다. 알게 뭐람, 공짜라면 그저 좋아 혼자 극장으로 내달렸다. 이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종종 버거웠다. 돌아와선 재밌었다고만, 엄마에게 말했다. 자율적이지
비 요란스레 쏟아졌다. 우수수 낙엽 졌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선 사물놀이패가 무대에 올라 영남농악을 두들겼다. 관계자 몇몇이 흥을 돋우느라 그 앞에서 비 맞아 가며 덩실댔다. 팔도 농촌 특산물 천막에는 낙엽만 다닥다닥 붙었다. 가을, 광장엔 이런저런 축제가 많았으니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비가 온대도 약속은 지켜야 했다. 청와대 앞길엔 약속을 지켜라, 구호